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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an 10. 2024

12화. 외할머니의 딸, 딸의 엄마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식이지요.

외할머니에게 엄마는 맏이이자 첫째 딸이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전화하는 든든한 자식이다. 딸은 곧 살림밑천으로 여겨졌던 기이한 시대에 엄마는 큰 딸로서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돕고 동생들을 업어 키워야 했지만 외할머니에게 대우만큼은 살뜰하게 받았다. 일례로 외할머니는 엄마가 나서서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려 하면 "시집가면 다하게 되어있는데 적어도 그전엔 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본인이 그 일을 다하셨단다. 사실 현재의 나에겐 그 말조차 불편하게 들리지만(시집이 집안일하러 가는 건 아니지 않나요) 딸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도 상당히 진보함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외할머니의 이런 교육 방식은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공교롭게도 두 딸을 낳은 엄마는 내가 비혼을 하겠다 선언한 후에도 무언가 나서서 하려 하면 "나중에 너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해주라"며 본인의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 자신과 부모님 인뎁쇼? 싶지만 순순히 물러나야 할 기세였다. 언니 역시 같은 교육을 받고자라 집에서 따로 살림을 거드는 일은 없었다. 그저 각자 자기 공간 깨끗이 유지하고 엄마가 필요할 때 '돕는' 개념 정도.


나야 비혼으로 엄마아빠와 살기 때문에 이전과 상황이 같다 해도 결혼과 출산에 모두 성공한 언니에겐 다른 미래가 펼쳐져있었다. 아무리 내 언니라지만 '살림을 하긴 할까' 싶던 언니가 엄마한테 수시로 전화해 레시피를 묻고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묻는 것은 대단히 생소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언니네 집에 가면 뽀송뽀송 개인 빨래들이 옷장에 깔끔하게 도열되어 있었고 아가를 위해 소음 방지 매트를 줄지어 깔아놓은 걸 보고도 놀랬었지. 엄마의 염원대로 언니는 언니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이전에 비축해 둔 에너지를 열렬히, 정성스레 쓰고 있다.


웃긴 일은 조카가 조금씩 크며 일어났다. 외할머니는 아가를 엄청 좋아하시는데, 코로나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조카가 두 살이 될 때까지 얼굴 한번 실제로 못 보시고 사진으로만 아쉬움을 달래셔야 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엄마에게 전화해 "우리 똘똘이는 어떻게 지내냐"라고 근황을 물으셨고 가끔 엄마가 할머니댁에 가면 할머니 핸드폰에 사진을 옮겨 바탕화면으로 설정해 두고 온다고 했다. 그럼 외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증손주의 얼굴을 보면서 오늘도 잘 일어났다 인사하셨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외할머니는 본인의 딸인 엄마가 먼저 걱정이 되셨나 보다. 엄마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쫓아다니는 조카의 애정표현이 못내 두려우셨는지 엄마가 언니네 집에 내려가 며칠 있다 오는 날이면 항상 그 끝에 전화를 걸어 항상 딸의 안부를 물으셨다. 엄마는 설사 본인이 힘들다고 해도 언니 앞에선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으니, 외할머니 전화에서나 슬몃 본심을 이야기하고. 손주와 딸 앞에선 의젓하게 이래라저래라 했던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늘어놓는 투정이라니. 정말 웃기고 귀엽다.


언니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 언니도 자식을 낳아본 입장이 되었으니 본인을 그만큼 키워낸 엄마가 엄청나게 크고 대단하다 여겨질 수 있겠지. 물론 나도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넘어서니 가끔 '엄마는 어떻게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언니랑 나를 낳아 키울 수 있었지?' 싶은 순간이 있긴 하지만 근래 내가 본 엄마는 외할머니가 아직도 걱정하고, 염려하는 작은 딸의 모습이다. 엄마가 어른스러운 사람이건, 나에게 수많은 인생의 지혜와 가르침을 줬건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면 엄마와 나의 관계를 지독히 닮아 있는 구석이 많아 가끔은 좀 무섭기도 하다. 엄마들이 화났을 때 으레 껏 쏘아붙이는 멘트인 "너도 커서 너 닮은 딸 낳아봐"라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는데, 글쎄. 엄마도 그 말을 자주 들었던 걸까. 분명한 건 나 역시 커서 딸한테 "네 손에 물 묻힐 생각하지 마"라고 얘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솔직한 내 꿈은 그냥 남한테 자기 살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것에는 욕심을 버렸으면 하는 건데... 모르겠다. 낳아봐야 알겠지. 근데 그런 일이 있긴 있으려나?


*일상의 한 장면

엄마: 너도 커서 너 닮은 딸 낳아봐!

나: 내가 사주 봤는데 나는 나보다 더 똑똑한 자식 낳는대. 부럽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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