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로 미역국을 끓이고 아이들 점심 도시락으로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그날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까지 끝냈다. 아이들 학교로 데려다주려면 1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날따라 빈속에 커피를 들이켜고 싶어서 커피를 끓이고 식탁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 해 보니 부동산 관리회사의 매니저 Maryke에게서 온 메일이다. 3개월에 한 번씩 한다는 Inspection을 한다는 메일이었다. Insepction은 부동산 회사 매너저가 세입자의 집에 있는 전자 제품이나 가구 등 옵션 상태는 어떤지 누수나 곰팡이는 없는지 살펴보고 세입자가 집을 깨끗하게 관리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세입자의 입장에서는 집 상태가 깨끗한지 검사받는 기분이다. 처음에 잘 이해가 안 갔던 것은 세입자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이 보조키로 문을 따고 들어 온다는 것이었다. 날짜만 알려줬지 시간도 자기 마음대로이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 사이에 온다니. 세입자의 입장에서만 보면 성가시기보다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내가 집에 없을 수도 있는 시간에 누군가가 집에 들어와서 구석구석 돌아본다는 것만 생각하면 찝찝하기도 했다. 신발이라도 벗고 들어올까? 며칠 전 우편으로도 받은 것 같았는데 3일 후에 온다니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베란다에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는 벌들이 무서워 며칠 동안 창문도 못 열었다. ‘아마도 Maryke가 오겠지. 신발이나 제대로 벗고 둘러볼까?’ Maryke는 짧은 금발머리에 말도 빠르고 독특한 억양의 영어를 써서 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트럭 3대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음만 내고 카펫 위에 머리카락 조차 빨아들이지 못하는 청소기를 가져가 달라고 Maryke에게 부탁한 것이 3개월 전이었다. 내 마음은 계속 투덜투덜. 아. 투덜거리지 말아야지.
뉴질랜드 집에서, 한여름에
집, 그리고 비싼 렌트비
일주일에 한 번씩 내는 주세가 일반적인 것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일주일에 430불(약 34만 원)씩 지불을 했다. 전세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에게 비싼 렌트비는 정말 과하다. 나도 보통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 Rental House는 집주인과 세입자와의 직접 거래보다는 Rental Property Management회사를 통해 계약했다.
집주인에 따라서 3개월 만에 두세 번씩 인스펙션을 하기도 한다던데 나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의 한국인 친구는 부동산 담당자가 처음에는 몇 번 오더니 인스펙션을 안 한지 일 년도 넘었다고 했다. 청소도 잘하고 집에서 신발을 벗고 다니는 한국인들을 집주인이 선호한다는 것은 익히 여러 번 들었다. 대부분의 중국인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주방이 지저분해져서 집주인들이 세입자로서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온 나, ‘이방인’는 집을 렌트해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관리하고 깨끗하게 사용했는지 그 나라에서의 ‘기록’이 없다. 집도 구하기 어려운데 그런 '기록'까지 없으면 마음에 드는 집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 집을 얻는데 참고인 역할을 하는 Reference.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은행 잔고 서류를 보여줬다. 지인에게 Reference도 받았다. 집 구하기도 어렵고 렌트비도 너무 비싸다. 투덜투덜.
청소, 청소, 청소
집안을 둘러보았다. 앉으면 지하세계로 푹 꺼져버릴 것 만 같은 소파, 스프링의 단단하고 차가움이 등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만 같은 침대, 상판과 몸판이 서로 의지해 간신히 붙잡고 있는 책상. 냉장고와 TV는 그래도 저 정도면 감사하다. 한국인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크나큰 식기류. 식기류 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엄청나게 큰 물컵의 사이즈였다. 식기류는 잘 싸서 수납 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렌트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유지를 해야 한다.창문 열어 환기시키고 간단하게 청소만 했던 샤워실도 박박 닦았다. 인스펙션 하는 김에 대청소까지 해보자고 해서 카펫 클리닝만 빼고 다 한 것 같다. 지저분해 보이는 것들은 전부 장 안에 넣어 주방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어차피 살림은 많이 없고 강제 미니멀이 되었으니 살림도 간소했다. 인스펙션을 하는 전날부터 웬만한 청소는 다 마쳤다.
첫 인스펙션 하는 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자마자 다시 뒷정리를 하느라 마음이 바빴다. 운동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지났을 즈음 내가 집에 있을 때 매니저인 Maryke가 왔다. 그녀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배가 많이 나왔다. 마른 몸집에 배만 나온 것이 임신한 것 같았다.
"혹시 임신한 것 아니니?"
"어. 맞아"
"잘 됐다. 너무 축하한다"
나는 살짝 호들갑을 떨었다. 짧은 대화들이 오갔다. Maryke는 말할 때 입꼬리가 항상 올라가는 밝고 좋은 사람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편은 있긴 한데 한국에 있다고 했다. 입꼬리를 올린 표정은 잠시 2초 ‘자동정지’가 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만 데리고 가족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 섬에 온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나 보다.
집 마당에 벌집이 생기다니
마당에 벌집이 생겼어
이삼일 전부터 베란다에 작은 벌집이 생겼는데 걱정이라는 것도 말해두었다. 벌 두세 마리가 윙윙거리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Maryke는 확인해 보더니 종종 있는 일이라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스프레이를 꺼내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벌집에 사정없이 뿌렸다. 잠시 뒤 작지만 무시무시하게만 보이던 벌집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풍선처럼 커지는 내 걱정도 툭 하니 떨어졌다. 그녀는 앞으로 Beehive가 생기면 ‘어디’에 가서 ‘이런 것’을 사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런 것’은 벌집을 죽이는 스프레이였고 모든 곳이 낯설었던 나는 ‘어디라고?’라며 재차 물어보았다. 그녀는 특유의 발음으로 ‘어디’라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시내 어딘가쯤되는 버닝 웨어하우스 (Bunning Warehouse)로 추측이 되었다.
첫 인스펙션은 깔끔하게 끝났다. 나는 전 주인에게 온 우편물을 모아서 Maryke에게 전달해 줬다. 연신 입꼬리를 올린 채 “Perfect!!”라 큰 소리로 말했다. 집이 아주 아주 깨끗하다며 흡족한 모양이었다. Maryke는 ‘perfect’라고 쓰인 레터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놓고 다음에 또 보자면서 집을 나섰다. 내 소심한 마음은 그날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합리적인 제도
그다음부터는 인스펙션이 임대인과 임차인에게 합리적인 제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날을 대비해 청소에 신경을 써야 하니 번거로운 일이었다. 가끔 시에서 운영하는 영어수업을 저렴하게 들었다. 나를 포함한 학생은 7-8명 정도. 우리나라의 ‘전세’ 제도를이야기했을 때였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무엇을 믿고 맡길 수가 있는 거죠?’라고 하면서. 생각해 보니 ‘월세’도 아닌 ‘주세’ 시스템인 뉴질랜드에서는 인스펙션이 합리적인 방법이다. 고장이나 보수를 해야 할 때는 서로 빨리 확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 인스펙션 때는 전구가 나갔다고 LED로 교체해 줄 수 있냐고 하니 매니저가 새 전구를 가져다주었다. 거실 테이블 다리가 부러져서 아이들이 다칠 뻔했다고 항의도 했다. 부실한 테이블 때문에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면서 항의하자 망가진 테이블을 가져가고 새 테이블로 교체해 주었다.
마지막에 한국으로 가져갈 짐을 다 빼고 Final inspection을 할 때였다. 짐도 정리하고 한국으로 가지고 갈 수 없는 물건들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벌처럼 윙윙거리며 마음이 바빴다. 보증금인 ‘Bond’ 비를 되돌려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인스펙션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일 년 동안 안전하게 지켜준 고마운 집. 구석구석 청소하며 모든 것을 깨끗하게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카펫 청소도 의뢰해서 말끔히 마쳤다. 마지막 인스펙션 (Final insepction) 하는 날. Maryke가 아닌 큰 키에 긴 머리를 한 ‘Charlotte’라는 매니저가 왔다. 아. 아마도 출산휴가에 들어갔겠구나.
집에 세입자가 없을 때에도 부동산 매니저가 문을 따고 들어오는 시스템인 인스펙션.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찌 보면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었다.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동산 담당 매니저였던 Maryke. 누군가가 나의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래도 ‘그녀’ 였기에 조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항상 ‘perfect’라고 쓰여 있는 레터를 주방 테이블 위에 놓고 갔던 그녀. 지금쯤은 Maryke의 아이는 말을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겠지. 아직도 낯선 곳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입꼬리를 올리겠지. 나에게 항상 해줬던 그 말 다시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