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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Apr 10. 2021

최악이 최악이 아닌 이유?

유명인의 생일날, 생을 마감하기로 한 사람

전 '그 사람'의 생일날 죽을 거예요. 

가지런한 단발머리, 단정한 교복, 다소곳이 포갠 손과 다리, 꽃꽂이 핀 등. 무척 모범생스러운 신애의 입에서 나온 첫 문장이었다. 
'그 사람'. 몇 달 전 뉴스를 통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심 좋아했었던 사람이어서 소식을 접했을 때 당황했었다. 

그 사람의 생일, 그날.
신애는 7여 년 우상이었던 '그 사람'의 방식 대신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방식을 선택했다.
'당신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은 힘들고 외로웠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멋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살아 내겠습니다. 슬픈 대로, 아픈 대로, 혹은 기쁜 대로 그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인간 중심 상담의 창시자 Carl Rogers는 인간의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간에 괴리가 있을 때 불안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상적 자아는 자신이 바라고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한 인식이며, 현실적 자아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아실현을 하려는 경향을 있기 때문에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의 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성장해간다. 그러나 이 간극이 너무 극명할 때 부적응이나 불안 등 정서적인 탈이 난다. 예를 들어서 어떤 고등학생은 의사가 되고 싶은데(이상적 자아) 성적이 낮다(현실적 자아). 이때 고등학생이 반드시 의사가 되어야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적이 낮아서 원서조차 내기 어려운 현재 자신의 모습에 심하게 불만족하고 자신을 한심스럽게 느낄 것이다. 사실 이상적 자아의 강렬함은 부모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아마도 의사가 되어야 만 한다는 신앙(?)을 가진 학생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의사가 되어야만 가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을 가능성 많다. 이와 같은 부모의 조건적 가치에서 자란 아이들, 즉, '이러이러해야만 넌 인정받을 수 있어', '넌 이러이러해야만 괜찮은 사람이야' 등 조건을 맞추어야만 인정받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타인의 인정을 받을때 가치롭게 느낀다. 이것이 이상적 자아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비극이다. 




신애는 '착하고 밝은 아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다재다능하고, 바쁜 부모님 대신 아픈 동생도 잘 돌보고, 동네 아줌마들에게도 싹싹하고, 친구들과 함께 봉사활동도 주도적으로 했다. 작은 동네에서 큰 동네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온 날 이후, 신애는 조금 평범해졌다. 평범한 학교 성적, 똑똑하고 야무진 도시 아이들, 삭막하고 딱딱한 학교. 하지만 특유의 밝음으로 신애는 여전히 '착하고 밝은 아이'였다. '착하고 밝은' 천사는 친구들에 대한 시샘도, 교사에 대한 반항도, 성적에 대한 불안도 가져서는 안 된다. 소유해서는 안되는 감정들은 '그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살아생전 가져보지 못한 슬픔이 휘몰아쳤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학교 친구들이 생생히 밉고, 교사들의 처신에 불끈불끈 분노가 터지고, 평범한 자신이 끝 간대 없이 한심해졌다. 더러운 감정 덩어리가 되었다. 더 이상 '착하고 밝은' 아이는 존재하지 못했다. 존재해야만 하는데 존재할 수 없었다. 


"네가 생각하는 최악이 무엇이야?"
"이대로 학교를 그만둔다면 대학을 못 가겠죠?."
"대학을 못 가면 어떻게 되는 거야?"
"..... 대학을 못 간다면 사람들이 실망하겠죠?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떨 것 같아?"

"슬플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울 것 같기도 해요."

"자유로울 것 같다?"

"네... 그 사람들이 실망해도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할 것 같아요."
"네가 최악이라고 하는 경우가 네가 가장 원하는 것 같기도 하네?"
"선생님, 이렇게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요?"
"도망가는 거면 안되나? 근데 사실 네게 유예기간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최선의 길을 찾는 것 같기도 해." 
"남들이 도망이라고 해도 제가 숨 쉬며 살고 싶어요.  다시는 사람들의 시선 속 어릿광대로 살고 싶지 않아요."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삶의 댓가로 나는 혼란, 불확실, 공포, 정서적 기복이라는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충분하다' -Carl Rogers.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만들어 준 모습, 살아왔던 세상에서 규정한 모습이 될 필요는 없다. 

남들이 보는 내가 진짜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 

타인의 기대가 버거워 숨이 막힐 때, 

진짜 내가 무엇인지 몰라 공허하다 느껴질 때 

과감히 멈춰도 좋다.

때로 회피도 하고, 돌아도 가고, 도망쳐도 좋다. 

충분히 괜찮은 나는, 그리고 당신은 가보지 않은 삶의 여정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탐험할 자격이 있다. 




그는 학교를 떠났다. 세상이 그에게 요구한 틀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미지의 세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우리,
미지의 세상으로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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