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동짓날이 왔다. 작년에 이어 홈리스 추모제에 가기로 했다. 추모제에서 이수정씨가 노래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추모제가 시작되기 전, 추모제 기획단은 서울역 광장에서 홈리스 법률상담, 거리사랑방, 초상사진관, 노숙탈출 윷놀이, 삼행시 짓기, 액운 날리기를 하며 사전행사를 열었다. 한쪽에서는 액운을 쫓는다는 팥죽을 나눠주었다. 팥죽을 한 그릇 들고 무대가 있는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홈리스 추모제’에 참가하기 위해 거리에 계신 분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무대 앞 현수막에는 “거리와 시설, 쪽방, 고시원 등지의 열악한 거처에서 삶을 마감한 홈리스를 기억한다”는 문구와 함께 올해 숨을 거둔 166명의 영정이 그려져 있었다. 홈리스 당사자의 추모글에 이어 ‘아랫마을 홈리스야학 노래교실’ 수강생들이 공연을 했다. 그 속에 수정씨의 얼굴이 보였다. 내 짐작이 맞았다. 수정씨는 오늘도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뽐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굴’과 ‘떠나가는 배’ 두 곡을 합창했다. 이 날 추모제에서 눈길을 끈 장면은 한 여성홈리스가 먼저 떠나간 동료 홈리스에게 쓴 편지를 읽는 모습 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쥔 채 추모글을 읽는 그녀의 눈, 나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언니는 20살 쯤 서울역에 올라왔다. 15살 때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다가 남편의 가정폭력과 바람 때문에 이혼하고 서울에 홀로 와서 노숙했다. 나와 같이 장애가 있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언니는 빈 병과 신문을 모아 팔았고, 구리를 까서 팔아 나오는 돈으로 생활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에게 컵라면, 밥, 음료수, 담배를 사줬다. 언니는 고생하다가 쪽방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7년 전 딱 이맘 때 언니에게 전기장판 2~3만원 주면 살 수 있으니 깔고 자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쪽방의 찬 바닥에서 자다가 죽었다고 했다. 언니의 언니가 시신을 인수했지만 하루장만 했단다. 어디에 뿌렸는지, 모셨는지 내가 알 수 없다. 가난도, 아픈 것도 없어도 되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세요.”
편지를 읽는 그녀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해야 맞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대신 그녀들을 숨게 만든 장벽을 부수겠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