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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메디아 Feb 11. 2023

염미정, 불안으로부터 홀로서기

「나의 해방일지」 리뷰 (4)

염미정, 불안으로부터 홀로서기


부모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아직 독립하지 못한 세 명의 자아들 중, 마지막, 염미정은 세 번째 자아이다. 그리고 이 자아는 '불안으로부터 홀로서기'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자유로워야 한다', 혹은 '내 삶을 내가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은 애초에 이 삶에 내던져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막상 내던져졌는데 알아서 삶을 이끌어가라니. 고독한 일이다.


자유를 선고받은 염미정이 느끼는 불안에는 고독감과 무기력감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흔하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염미정이 다른 남매들보다 더 주인공 롤을 맡아 극을 이끌게 된 이유에는 이 부분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살았으면 우리 달랐어?”
“달랐어.” “달랐다고 본다.”
“난 어디서나 똑같았을 것 같은데. 어디서나... 이랬을 것 같애.”

- 「나의 해방일지」 1화


염미정의 불안은 결코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서울에 살았으면 우리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염창희와 오두환과는 달리, 염미정은 '이상 = 서울 / 현실 = 비서울' 간의 괴리를 떠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즉, 이러한 불안은 염미정에게 고정적인 현실이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돈이 많든 적든, 이것들과 무관하게 염미정의 결여는 누군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홀로 삶을 살아가는 데서 비롯되므로,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바뀔 수 없다. 염미정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가상의 '당신'을 상정하기에 이른다. 결여된 의식을 어떻게든 채우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본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당신과 함께 여기 앉아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이런 그지같은 일도 아름다운 일이 돼요. 견딜만한 일이 돼요. 연기하는 거에요. 사랑받는 여자인 척,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척. 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의 지지를 받고, 그래서 편안한 상태라고 상상하고 싶어요. 난 벌써 당신과 행복한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당신 없이 있던 시간에 힘들었던 것보다 당신을 생각하면서 힘을 냈다는 게 더 기특하지 않나요?

- 「나의 해방일지」 1화


고독감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안을 직시함과 동시에 본인의 자유를 긍정적으로 행사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타인을 무시할 수가 없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 아닌가. 그러나 말마따나, 타인은 지옥이다. 타인은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만든다. 가상의 '당신'이 낫다.



염미정의 현실에는 이러한 '당신'이 있어본 적이 없다. 염미정은 남친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받지 못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믿은 자신을 '20점짜리 시험'에 비유한다. 앞으로 과연 100점을 맞을 수 있을까?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이미 20점이 찍혀버린 이상, 이미 다 정해져버린 수순 아닐까? 이대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염미정은 지쳤다. 불안에 지쳤고, 불안에 따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나태해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것은 '구씨'라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출신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구씨라는 것과 그 역시 외롭고 불안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구씨는 술과 노동에 스스로를 가둔다. 구씨는 염미정이 지금껏 만난 상대들과는 다르다. 글씨를 쓰기 위한 펜, 나를 시원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에어컨, 음악을 듣기 위한 이어폰과 같은 사물이 아니라 그 어떤 조건에서도 해방된 '구씨'라는 인간 존재에게, 염미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에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 「나의 해방일지」 2화


이를 통해 둘 사이에는 서로의 쓸모를 위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그 자체로 추앙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사랑은 인간과의 융합에 그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앙금도 생긴다. 그러면서 지쳐가기도 한다. 염미정은 이를 초월하고 싶다. 불안, 결핍, 외로움으로 인해 한껏 낮아져버린 두 인간의 삶을 보다 더 가치있게 만들고자 한다. 염미정이 말하는 추앙은 다음 대사에서 드러난다.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거?”
“확실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 「나의 해방일지」 4화


염미정은 내던진다. 본인의 외로운 삶을 그 자체로 남겨두지 않고, 구씨에게 본인의 삶을 내던진 셈이다. 그리고 '너도 나를 추앙함으로써 너를 내던져'라고 명령한 셈이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기투(projet)'와 관련이 있다.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를 지향하여 본인을 내던지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염미정은 기투했다. 이에 대해서 구씨 역시 기투한다. 구씨의 기투는 염미정의 모자를 줍기 위한 어마무시한 점프로서 형상화된다.



구씨가 염미정의 사물을 위해 몸을 내던짐으로써 구씨는 기투한다.' 이만큼의 거리는 어려울 것 같다'라는 걱정이나, '이만큼의 거리는 내가 뛸 수 있는 조건에서 부적합하다'라는 계산은 뒤로 한 채, 구씨는 추앙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발생한다. 둘은 서로를 교육함으로써 삶의 나태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1화에서 가상의 '당신'을 상정하던 염미정은 구씨를 통해 이 상상이 현실이 되어감을 느낀다.


염미정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나의 해방일지」 8화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교육하기 전, 불안하고 무기력하며 고독했을 때의 과거로부터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나보다. 그 역시 인간이 자유로움으로써 선택한 과거였기 때문이다. 구씨는 불가피하게 염미정을 떠나고, 과거로의 자신으로 회귀한다. 염미정은 이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


당신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길 바랄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거야.

- 「나의 해방일지」 12화


이는 단순한 ex-연인 관계에서는 당연히 있을 수 없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로서 '추앙'했을 때만 가능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염미정은 구씨가 고통스럽지 않기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바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염미정의 성장을 목격한다. 본인이 불안하고 괴로우면 가질 수 없는 타인을 향한 마음, 가상의 '당신'이 아닌 구씨라는 구체적 '당신'을 향해 오롯이 바라는 이 마음은 비교육된(uneducated) 염미정에게서 나올 수 없는 마음이다.


구씨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비서울에서 서울로 이사갈 수는 있어도, 교육되기 전의 나로 완전히 돌아갈 수는 없다. 교육 역시 나라는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것이며, 그것에 의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구씨는 염미정을 떠날 수 없음이 드러나고, 결국 둘은 재회한다.



염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했고, 재회한 이후에는 구씨에게 타인을 향해 환대하라고 말한다. 추앙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지지하는 것이라면, 환대는 그러한 '존재성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존재가 이해타산적이며, 존재를 독점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를 '환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환대는 타자를 나의 집에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이로써 인간은 불안과 고독감을 극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충격적이었는데, 일반적인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둘 간의 관계가 완성되는 해피 엔딩, 혹은 둘 간의 관계가 무너지는 새드 엔딩으로 귀결되는 데 그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해방일지]는 서로의 관계 및 존재성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까지 다루고 있다. '환대'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위 장면 이후 구씨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깐 살아서 보자."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처럼 확실하게 사랑과 추앙을 통한 개인의 성장, 교육됨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흔치 않아서 놀랍다.


불안과 외로움에 놓여있던 염미정과 구씨가 서로를 추앙하고 끝내 환대로 나아가는 일련의 교육적 과정은 현대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계속 말했지만 불안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숙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불안한 인간이 가지는 괴로움을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염미정과 구씨의 서사를 통해 제시해낸다. 이에 따른 교육은 어른들뿐 아니라, 이제 갓 삶을 시작한 아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아이들은 본인들의 선택과 무관하게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나, 자유와 그에 따른 불안을 동시에 안고 살게 된다. 부모와 분리되면 불안함을 표출하고, 부모와 애착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안정감을 느낀다. 한편 이 과정에서 고착이 발생하면 성인기에 진입한 이후 이슈가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지식을 전달하는 협의의 교육을 넘어서야 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유라는 형벌을 받은 존재이고, 자유를 기반으로 오롯이 본인의 삶을 이끌어가야 하는 존재라는 점.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안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극복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는 타인과의 건강한 의사소통과 추앙, 더 나아가 환대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 또한 이조차도 본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선택된 것인 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점. 이 점들을 느끼게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말해주어야 한다.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진정한 어른인 것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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