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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 연습 Oct 19. 2021

일기 쓰기

나는 일기를 쓴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쓰려고 하지만 특별한 날이 잘 없다.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살 수 있다면 매일을 새로운 마음으로 쓰겠지만 나에겐 그런 특별한 능력이 없다. 어쩌다 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날이 급하게 올뿐이다. 비슷한 오늘들이 다 지나가버리고 일기의 주기는 보름, 한 달, 분기 단위로 너풀거린다. 그러니 일기를 쓴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매일 습관처럼 써야 그게 일기일 텐데 그런 훌륭한 습관을 나에게 붙일 수가 없다.


정정한다. 나에게는 가끔 일기를 쓰는 날이 찾아온다. 그런 날엔 꼭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밀린 일기를 쓴다. 그러고는 예전에 썼던 일기들을 읽어본다.


어떤 해는 고작 아홉 페이지 속에 일 년이 다 들어가 있다. 내 순간순간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 외장 메모리에다 내 기억들을 옮겨놓은 것이 일기인데, 도무지 옮기질 않으니 한 해가 허무하게 축약돼버린다. 그런 해는 반성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불성실에 대해 후회할 뿐이다.


어떤 해는 이별의 감상만으로 가득 차있다. 이별이 이렇게나 아팠더란 말이지. 나는 생소한 과거에 공감도 제대로 못한다. 문제는 이토록 아팠음에도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음에 있다. 한 해가 한 번의 이별만으로 기록되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 번의 사랑으로 일 년 내내 진지하게 아파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내 일기장에는 한 해에도 몇 번의 이별이 그려져 있다. 똑같은 스케치에 다른 색깔로 색칠. 반복에 반복. 사람 좀 되자고 내 종아리를 때리는 회초리는 비단으로 만든 듯 내 살갗을 간지럽히지도 못한다. 그런 나르시시즘의 기록을 가만히 읽고 있는 자체가 형벌이라 다시는 이러지 말자고 결심하게 될 뿐. 그래 봤자 또 같은 스케치에 다른 색의 그림이 또 그려지겠지만.


어떤 때는 유서도 썼다. 죽으리라는 결심에서 쓴 것은 아니다. 내 평생 그런 결심은 해본 적 없으며, 앞으로도 부디 그러하기를 희망한다. 그때의 유서는 지금 죽으면 어떤 삶일지 스스로 되돌아보기 위해 쓴 것이다. 유서는 나 자신에 대해 '자유로운 인생을 꿈꾸기만 했을 뿐, 정작 주둥이 터진 풍선처럼 되는대로 살아왔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 놀랍도록 정확하다. 이제는 바람이 다 빠져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2년 전, 나는 나에게 크게 실망한 모양이다. 혼자만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그 꿈같은 현실이 내게 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라고. 기억난다. 나를 향한 심한 채찍질. 그럼에도 결국 나는 그 자리 그대로인 채 2년 뒤 지금을 맞이했다.


시시하지 않은 나를 바라며, 어쩌면 나아질지도 모르는 내일을 바라며 무의미한 결심을 나열할 때가 있다. 일기를 쓰고 싶은 날은 대개 그런 결심에서부터 찾아온다. 그 결심이 모이고 모여 내 일기를 구성하지만, 결심은 결심에서 그치고 정작 나를 구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 피어오르는 같은 냄새의 패배감 때문에 다시금 일기를 보며 어제들과 오늘들이 꼭 같음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내 삶 곳곳에 붙여두고 나중의 적당한 때를 기대하는 못난 태도. 그놈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은 항상 내년 정도에 있다.


 한 편으로는 일기에서 보이는 같은 패턴의 반복에 안도하기도 한다. 달라지기를 희망했음에도 추호도 변하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운 건 사실이나, 채찍질의 방향이 항상 같다는 점에서 어쩌면 내 삶이 바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합리적이고도 희망적인 의심이 드는 것이다. 좀처럼 안타를 치지 못하는 타자를 선발 명단에 올리는 감독처럼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관중의 야유를 못 들은 체하며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있다. 대체 뭘 믿고 기용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다행인지 감독이 바뀔 일은 없다. 선수도 나뿐이다. 믿음을 보내는 것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일기들에 이어, 과거의 나를 이어, 다시 일기를 쓴다. 그래도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 내일은 조금 낫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나를 기록한다. 나아지고 싶은 다짐으로 가득 찬 허망한 일기장이라도 그게 내 인생이니까. 나 말고는 내 인생을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을 테니까. 나 말고는 아무도 내 인생을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동어반복일지라도, 텅 빈 페이지보다는 뭐라도 채워진 게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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