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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연차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성과를 봤음직하다.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더 정확하게는 실패다.
적어도 입사 초기 회사생활을 시작할 때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다.
나는 지역 언론사 기자다.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서울 언론사와 지역 언론사는 근무환경이 천양지차다.
서울 언론사는 우선 인원이 많다. 기자 개개인이 보다 전문적인 분야를 맡아 능력을 키워 갈 수 있다.
반면 지역 언론사는 인원이 절대적으로 적다. 전문*특화보다는 잡식성이다.
닥치는 대로, 니 분야 내 분야 할 것 없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회사의 규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알리는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다.
글 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기자가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성공하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입사하고 3년 정도까지는 열심히 했다. 그런데 한계에 부딪쳤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참된 언론의 모습이 없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던 참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잠시 귀를 의심했다.
못 알아듣고 있자 옆 사진기자 선배가 쿡쿡 찌르며 얼른 나가자고 했다.
회사 능력에서 가장 크게 요구되는 눈치가 내게는 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이용당했다. 부끄러웠다.
나름 늦게까지 자료 준비하고 이슈거리를 뽑으려 한 자신이 우습게 보였다.
그런 식으로 회사의 도구로 전락해갔다.
많은 소모품 중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군다나 교체가 쉬운 부품이었다.
기자로서 자부심 하나로 버티던 삶이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작은 회사지만 들어왔다.
그런데 회사는 '돈 되는', '돈 버는'기자를 원하고 있었다.
라며 위로했다.
그렇지만 나는 정신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영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졌다. 공황장애가 온 것도 그즈음이다.
공황장애는 다양한 형태로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출근길에 운전을 하던 중이었다. 앞서 달리던 트럭을 보며 추돌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의로 회사를 그만둘 용기가 없자 타의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이런 마음들이 쌓여 어느 날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이 왔고 결국 공황장애라는 병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꿈도 사라지고 언론인이 아닌 회사원으로서 버티다 버티다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20년 직장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내세울 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버텼다.
오늘도 한발 한발 걷는다.
뛰지는 못하지만 걷는 것도 나아가는 것이다.
늦더라도 전진하고는 있다. 그러면 됐다.
앞으로만 향하면 된다. 뒤는 돌아보지 말자.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