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차/‘같음’이 ‘깊음’이 되자 글이 써지다

by 집녀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


숙제 같아서 싫다.

쓰다가 안 쓰면 괜히 죄책감이 들고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방학숙제인 일기를 항상 몰아 썼다.

한 번도 제 날짜에 쓴 적이 없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 며칠 전 한 달치를 몰아서 쓴다.

기억해내서 쓰는 게 아니라 대부분 지어서 썼다.

날씨만 잘 맞추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게 일기가 숙제 같았던 이유다.


그런 내가 미국에 와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1년은 특별하기 때문에 매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기를 진심으로 한 번은 써보자는 다짐이 들어서다.

그런데 되레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로 글쓰기를 중단했다.

모든 것이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글이 써질 상황이 아니었다.

자포자기처럼, 가혹한 운명에 힘없이 무너져 내려 잠만 잤다.


‘일기’도 허덕이며 쓰던 내가 이번엔 ‘글’이란 것을 쓰고 싶어 졌다.

내가 봐도 놀라운 변화.


나는 기자다.


‘글 쓰는 것이 직업이니 뭐가 어렵겠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직업일수록 글은 어렵다.

직업인데도 글을 못 쓰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남들이 웃으면서

‘앞으로 잘 쓰게 될 거야

라고 격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글도 못쓴다면서 어찌 기자를 할까? 글도 못쓰면서 기자를 하다니’

라는 비난의 시선이 바로 꽂힌다.

이런 비난이 싫어서라도 그동안 기사 이외에 다른 글은 쓰지 않았다.

재능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풀이 글쓰기’


나는 지금의 글쓰기를 이렇게 규정지었다.

속에 담고 있으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아서,

그 암세포 같은 것들을 배설해 내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다.


속에서 곪느니 밖에서 터트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잘 쓸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것도 아니니까.

그 생각을 하자 글 쓰는 게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운동을 하지 않는 집에서는 먹고 자고 씻고... 그게 다였다.

본능적인 삶.

몸은 움직이되 뇌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삶이 계속되고 있었다.


뇌가 녹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노트북을 꺼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거창한 것 필요 없다.

일기처럼 매일 쓰는 부담도 없애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자.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것은 걷기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차분함 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딘가에 집중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얄팍한 생각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살던 사람이다.

그러던 내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거리를 걷는다.

같은 사람, 같은 풍경을 지나친다.

같은 것이 반복되면 무심해질 수 있다. 지겨워질 수 있다.


그런데 내겐 이 '같음'이 오히려 '깊음'이 되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별 것 아닌 사물이 달라 보이고, 스쳐 지나갔던 생각들이 의미가 되어 돌아왔다.

걷다 보니 생각하게 되고 쓰고 싶어진 것이다.


'걷기 운동'은 '몸을 쓰는 운동'이 아니었다.

'마음을 쓰는 운'동이었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