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 버리기
이 년 전 첫째 아이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방학이면 오전마다 아이와 같이 도서관에 갔다. 책을 골라주지도, 읽고 있는 책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떨어져 앉아 각자 원하는 책을 읽었다. 독서의 효용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독서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즐거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어느 순간 책에서 고개를 들고 보니 아이는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빠르게 읽고 다시 가져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다 못해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게 중요하다 말해줬지만 아이가 정독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충 읽는 독서 습관이 자리 잡힐까 염려스러웠다. 억지로 독후 활동을 시켜 독서를 학습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사춘기를 목전에 둔 시기라 시간이 지나면 독서 지도를 시도해도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독서 모임에서 다룬 책들이 오래 기억에 남고 관련 도서를 찾아 읽은 경험을 떠올렸다. 우선은 가볍게 친구들과 읽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독서모임 제안에 아이 친구의 엄마들은 반색했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반응에 이대로 지속된다면 고1 정도엔 니체나 논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심 설레기도 했다.
고학년 대열에 들어선 아이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책과 모임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간식을 바리바리 준비해 쌓아 두고 모임과 키즈카페 뒤풀이를 세트로 묶었다.
학원, 게임, 운동 등 갈수록 바빠진 아이들은 어느새 다음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이 주마다 우리 집으로 모이는 일정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진행은 다른 엄마들과 돌아가며 하다가 도움이 될까 싶어 중간에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딴 내가 쭉 맡게 되었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한 권을 읽고 나면 관련된 다른 책도 보여주고 싶고 집어든 책 옆의 좋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공부로 부담을 느낄까 봐 논술 수업이 아니라 했고 덕분에 아이들이 모임을 편안하게 받아들였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저학년 때부터 시작했으면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글쓰기에도 도움이 되었겠다 싶었다.
그렇게 아들의 입학을 벼르며 기다렸다.
같이 축구 수업을 다니는 친구 한 명과 친해지게 되어 두 명이서 독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들은 누나가 거실에서 독서 모임을 할 때 방에서 종이접기를 하거나 dvd를 보며 기웃대고는 했다. 피아노 학원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자기도 누나처럼 뭔가를 또 한다는 사실이 신난 듯했다.
첫 책을 읽고 모인 아이들을 위해 단어 카드와 활동지를 준비했다. 다양한 간식도 식탁 위에 벌여 놓았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거나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초1의 분위기였다. 아들의 친구 엄마와 나는 수시로 서로의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팔을 잡아끌며 첫 모임을 끝냈다.
두 번째 모임을 앞두고 난관에 부딪혔다. 아들 친구의 항의가 있었다.
전 공부하기 싫고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데요.
공부 아니야. 책 읽고 이야기하는 거야.
글씨도 썼잖아요. 학원이랑 같은 거 아니에요?
결국 두 번째 모임은 책 없이 놀이터에서 축구공을 차며 보냈다. 글쓰기의 워밍업으로 단어라도 써 볼까 하던 생각을 접어두고 아이들의 집중력을 고려해 모임 시간도 탄력 있게 조절했다. 잦은 회유와 숱한 놀이터 회동을 거치며 초1 독서모임은 5회 차를 맞이했다.
이번 책은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꾀 많은 총각이 자신의 좁쌀 한 알을 주막에 머물 때마다 쥐, 개, 말 등으로 바꿔가다 결국 정승의 딸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였다. 전래 동화 특유의 억지스러운 내용 전개가 있었지만 그런 점에서 질문거리를 염두에 뒀다.
모임 전에 아들을 앉혀 놓고 몇 차례 책을 읽어주었다. 저만치서 숙제를 하던 딸이 말도 안 된다며 한마디를 보탰다. 전래동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은 의외로 재밌어하며 책 내용에 귀 기울였다.
모임날 초1 남아들은 여지없이 상기된 얼굴로 만났다. 음료수와 과일을 허겁지겁 먹은 후 십 분 정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나 싶을 즈음 의자가 들썩였다. 친구가 가져온 장난감 수갑은 어느새 아들에게 채워져 있었고 발로 찬 쿠션은 벽을 향해 날아갔다.
네가 총각에게 물건을 내주게 된 주막 주인이라면 어땠을 거 같아, 쥐를 잡아먹었다고 고양이를 내놓으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진지한 물음들은 아이들의 엉뚱한 소리와 감탄사에 묻혀버렸다.
준비한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단어 찾기를 했다.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조용히 신문을 살펴보다가도 뭐가 웃기는지 깔깔대며 떠들었다. 드물지만 말소리가 멈추고 잠깐씩 오는 집중의 순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골똘히 단어를 찾던 한 녀석이 무심히 한 마디를 했다.
그래도 총각이 나빴다
신문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다른 녀석이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맞아, 주막 주인들한테 심했어.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날카로운 초1들이라니. 오늘은 이걸로 됐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아이와 관련된 것에는 야금야금 욕심이 끼어든다. 내가 좋다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또 잊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