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다음 날 일정이 있어 오랜만에 명절을 앞두고 본가(=친정)에 먼저 들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부모님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요즘 발바닥이 아파서 잘 못 걸으시는 울 엄마께 본인이 신어 본 러닝화를 사 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도착하자 마자 남편은 어머니에게 신발 사러 가자고 조릅니다.
과일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방과 식당이 부쩍 깨끗해져 있습니다.
"오잉? 엄마가 정리하셨어요? 지나치게 깨끗한데? ㅎㅎㅎ"
알고 보니 남동생 부부가 하루 일찍 도착해 깨끗이 정리 정돈을 해 놓았습니다. 이번엔 정리하려고 벼르고 왔답니다.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합니다. 너무 잘 했다고, 너무 깨끗해져서 깜짝 놀랐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는 모두 완연한 노인이 되신 부모님이 사시는 집과 집기들. 오래 살아서인지 또는 눈이 어두워지셔서인지 또는 쓸고 닦을 기운이 많이 약해지셔서인지 부쩍 전보다 깔끔하지 못한 곳들이 눈에 띄는데 동생 부부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저는 씻으러 들어가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옵니다. 거울, 세면대, 수전, 욕조... 싹싹 닦아 놓고 세면대에 늘어 놓은 작은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를 잡아 놓고 한 번 여쭤본 후 버릴 것들을 버립니다. 변기도 장갑 끼고 싹싹 닦습니다.
아침 식사를 함께 준비하려는데 냉동실 한 칸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아침에야 아셨다고 합니다.
아이코, 열어 보니 음식들이 녹아 있습니다. 급한대로 옆 냉동실로 모두 옮기려니 정리가 필요합니다. 이참에 잘 됐습니다. ㅎㅎㅎㅎㅎ
음식물을 모조리 꺼내고 서랍도 모두 꺼냈습니다. 내가 움직이니 남편도 어느 새 옆에 와 있습니다. 서랍을 꺼냈더니 "내가 서랍 닦을 테니 음식물 정리를 여보가 하는게 낫겠어." 합니다. 그는 냉큼 냉장고 서랍들을 들고 씻으러 갑니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계십니다. "엄마, 유통기한 지난 음식물은 버릴께요!" 선포합니다. 예상대로 유통기한 지난 음식물이 많습니다. 흠흠. 정체 모를 음식물도 많습니다. 냉동실에서 웬 막대기가 나옵니다. 알고 보니 긴 떡이네요. "엄마, 떡이 막대기 됐는데요? ㅋㅋㅋ" 엄마를 놀렸더니 당신도 웃겨서 깔깔 대십니다. "그래. 버리려고 했어. 다 버려도 돼."
엄마의 말에 힘입어 정체 모를 음식들, 오래 된 음식들 몽땅 버렸습니다. 신나게 버렸습니다.
역시 버려야 정리가 가능합니다. 고춧가루, 버섯가루, 들깨가루 등등 가루를 가루끼리 모아 서랍에 넣었습니다. 고기는 고기끼리, 건어물은 건어물끼리, 떡과 전은 당장 쓰신다 하니 모아 정리합니다. 두 칸에 나뉘어 있던 음식물들이 모두 한 칸에 정리되었습니다. 속이 후련합니다. 엄마도 엄두가 안 나서 못 했는데, 너무 속시원하고 좋다 하십니다.
남동생과는 명절에 늘 엇갈리는 운명(?)인데 우리가 일찍 내려가 오랫만에 만난 터라 온 가족 외식하고 들어오는 길에, 남동생 부부와 오랜만에 맥주 집에 들렀습니다.
어제는 유차원생 막내 조카가 한바탕 눈물 바람을 했다 합니다. 아버지가 관상인지 사주를 보는 지인께 들으신 모양입니다. 91세까지는 건강히 사신다고요. 할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는 막내 조카가 그 얘길 듣고는 할아버지 앞으로 7년 밖에 못 산다며 엉엉 울었다는 겁니다. 모두들 웃으면서도 뭉클해했습니다.
집에 오니 큰 조카가 보드게임을 들여다보고 있길래 궁금해 저도 들여다 봅니다.
"이거 무슨 게임이야?"
옆에서 올케가 거듭니다.
"고모랑 한 판 해. 고모 게임의 여왕이야!"
오랜만에 초등학생 조카와 보드 게임도 했습니다. "고모 엄청 잘 하는 거 알지?" 큰소리 치다가 깨졌습니다. ㅎㅎㅎ "OO이 많이 컸다! 왜 이렇게 잘 해? 삼세 판은 해야지!" 그 다음 판은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을 다해 이겼습니다. 안 봐 줘도 이제 안 웁니다. 많이 큰 조카가 저 따라 말합니다. “아이, 고모! 왜 이렇게 잘 해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가족.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운, 쉽지 않은 관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고 받고 나누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엄마 생각하는 마음도 귀합니다. 남동생과 올케가 부모님 생각하며 바삐 보낸 마음도 소중합니다. 냉장고 정리하고 나오니 제 마음도 홀가분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덕분에 마음이 환해져 시가로 출발합니다. 저도 작은 빛을 뿌리는 이가 되고 싶습니다.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라. 서로 나누는 삶이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태양이 세상을 밝게 만들듯이 그대의 마음 속에도 빛의 씨앗이 깃들어 있다. 그 빛을 찾아서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 누구나 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강할 때, 불만과 원망이 생기게 된다. 만약 주고자 하는 마음이 보다 강하다면 서로를 원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때마다 세상은 더욱 환하게 된다. 빛을 뿌리는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다. (주1)
주1> 발타자르 그라시안, 나를 아는 지혜, 1997, 하문사.
표지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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