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의 길목에서 떠올린 좌우명
며칠 전 아이들과 수업 중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게 되었다. 수녀의 길에서 방황하는 주인공 마리아에게 원장 수녀가 한 말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립니다. 자신의 길을 가세요.’
아, 이 영화에도 나오는 대사였구나... 몇 번을 본 영화였는데... 새삼 귀에 쏙 박혔다.
나는 20년도 더 전에 발령을 받아 교사가 되었고 그리고 이제 몇 년 후 나이 50, 학년에서는 최고령이다. 딱히 전문적인 교과도 행정적 경험도 부장 경력도 없이 그저 평범한 교사로 하루 일과를 지내기도 벅찬 40대 여교사. 꿈에서도 학교가 나오고 점심시간에 밥 먹으며 일기 검사, 자습 검사, 남아서 교재 연구, 퇴근해서 교과 연구 모임,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몸무게가 줄었던 20년 전의 나였는데... 돌아보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오늘 이 순간이 소중하다 그리고 만족한다.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내 인생의 한 문이 닫혔지만, 서서히 내 맘 속에 다른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발령을 받고 유능하고 전문가다운 교사를 꿈꾸며, 40대 아줌마 선생님들을 은근히 맘 속으로 비판하며, 영어 공부, 각종 연수, 교과 연구 모임에 밤낮으로 다니기도 했었다. 첫아이 임신 5개월 째인 서른 두 살 어느 날, 그저 아이 낳아서 꽤 괜찮은 전문직 남편과 꽤 괜찮은 전문직 교사로 살 줄 만 알았던 그때. 남편의 위암 3기 선고와 10년 생존 가능성 20프로 그리고 뱃속의 아이. 불러오는 배를 안고 네 시간 출퇴근, 항암 치료, 병원 쪽잠, 불행을 맞아 불쌍한 임산부로 온갖 동정을 사며 눈물로 떠나오던 기억들... 급히 시골로, 뱃속의 아이와 아픈 남편과 함께 친정 외엔 갈 곳이 없었다. 아빠 없는 아이가 될 뱃속 태아와 그 아이 엄마인 나를 생각하며 멈추지 않는 눈물의 출퇴근길. 서울의 삶의 접고 시골 학교로 옮겨 다시 사회 초년생인 듯한 가정의 가장으로, 환자의 간병인으로, 갓난아기 엄마로 하루하루 버티던 학교생활... 지치고 힘들었다. 삶이 너무 무거워 아침이면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하기 싫고 늘 어깨가 아팠다. 가까스로 다시 살아나고 일도 하게 된 남편이 절실하게 원했던 새 희망은 아이들이었다. 가정을 지키고자, 살고자 모험같이 세 아이를 낳았고 몸으로 길렀고, ‘나’는 지치고 지쳐갔다. 사회와 단절되고 10년 만에 학교로 돌아와 보니, 다시 나는 사회 초년생.
지난날의 모든 것이 쉽지 않았고 견뎌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나는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어서 좋고, 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좋고, 아이들을 보는 내 마음의 느린 박자가 편안하고,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나의 건강에 만족한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전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나처럼 자신의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동료 교사들이 안쓰럽고, 그들과 함께 힘을 내어 돕고 위로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학부모든, 아이들이든, 동료 교사든, 누구든 그 사람만의 내가 모르는 스토리가 있음을 생각한다.
혹시라도 누군가 지금 모든 문이 닫혔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열심히 살아왔고 최선을 다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울지도 모른다. 벗어날 수 없는 불행에 지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가고 견뎌왔던 지난 날들이 나를 밀어가는 힘이 되어, 어느 날 내가 상상 못 했던 전혀 다른 ‘나’로 살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달라진 마음으로 새로운 문이 열림을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더더욱 나답게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년 전 교실의 모든 식물을 죽이던 젊은 교사는 이제 아침에 학교 텃밭을 돌보며 식물들이 대견하다. 봄가을 한 번의 산행도 싫었던 젊은 교사는 이제 탁구 동아리를 만들어 동료들과 매주 운동을 한다. 오늘 하루 수업으로 결과물로 능력을 저울질하며 연연하던 젊은 교사는 이제 아이들을 퇴직 후에도 어디선가 함께 살아갈 동시대인이라 여기며, 그저 오늘을 함께 살아가려 한다. 남에게 보이는 유능함을 꿈꾸기보다는 소박한 나, 그냥 ‘나’를 찾고자 한다. 그것이 더 충만함을 주는 것을 알기에.
이제 인생 반 정도 지나왔다. 앞으로의 길도 쉽지 않을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지나온 시간을 잘 견뎌온 나를 위로하고 격려할 거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시간이 나에게 편안함을 줄 수도 있다는 것, 다른 길의 행복을 알게 한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며 나는 힘을 내어 이번 생의 나머지 반을 살아보려 또 견뎌보려 한다. 그리고 지금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도 힘을 내기를 바란다. 아무 일도 없는 삶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그리고 오늘 하루 아름답게 누리기를 나와 그들에게 진심으로 바래본다. 어느 작가의 이런 말들을 기억하며.
순간만이 영원하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