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을 땐
내 인생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나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지?
몇 번째의 포기를 했던 때일까?
의대에 진학해서 전문직에 진입하고 잘난 여자가 되어 엄마처럼 가부장적인 집에서 힘없는 여자가 아닌 큰소리치며 자기 삶을 사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남들도 많이 하는 첫 번째 포기.
체력적 한계와 성적의 한계 부딪치고 서울에 대한 갈망으로, 난 의치대를 포기했다. 결국 전문직은 아니지만 경제력은 있고, 전업주부는 아니지만 전업주부만큼 집안일을 하는 교직을 선택해서 살아왔다. 그 선택이 또 얼마나 많은 포기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후다다닥.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 나는 4층 교실에서 1층 보건실로 부리나케 뛰어 내려간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가방속에는 유축기가 들어 있다. 유축기가 무언지도 갓 몇 달 전에 알았을 뿐이다. 용감한 서른두 살의 새댁이었다. 보건실에서 아기 젖병 한가득 젖을 짜서 넣고 다시 유유히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는다. 이제 땡땡 젖이 차올라서 아픈 가슴이 편안해졌으니, 연구실에서 아이들 수업 기획, 자료 준비, 각종 서류 처리를 최대한 빨리하고 집으로 후다다닥.
가는 길이 바쁘다.
친정엄마가 사 오라는 과일이나 두부나 찬거리를 얼른 사 들고 친정에 들른다. 친정엄마 아빠는 아기 돌보기에 지치고 내가 돌아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잠시도 지체하면 안 되는 상황이다. 아기를 데리고 우리 집에 가서 이제부터는 저녁 준비다. 모든 반찬은 유기농 한식 가능한 채소와 잡곡.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많이 해보지도 않았지만, 열심히 한다. 내게 두 생명이 달렸다. 항암 치료 중인 남편. 모유 수유 중인 아기. 둘 다 시간에 딱 맞추어 식사하도록 내가 준비한다. 한 사람은 유기농 저염 잡곡 한식, 한 사람은 모유 수유.
마지막 설거지와 아기 목욕까지 끝내고 나는 이내 나가떨어진다.
눈을 뜨면 다시 하루가 시작이다.
어느 날 눈을 뜨니 어깨가 묵직했다.
나는 내 속도로 내 무게를 걸으며 살기를 포기했다. 내가 살려면 이 두 사람의 시간에 맞추어 그 무게를 견디며 걸어야 했다.
나도 모르게 했던 나의 무의식적인 두 번째 포기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모유 수유도 지나고 아기는 커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이제 좀 숨 쉴 만했다.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모유 수유는 안 해도 되니까. 남편은 24시간이 바쁘고 힘들다. 자기 식생활, 운동 생활, 직장 준비 사는 게 전쟁이다. 살아야 하기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라면을 먹지도 못하고 외식도 못하고 과자나 간식은 일절 금지. 기상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6시, 일어나면 혼자서 산으로 간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으나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 봐야 하니까. 그는 지금 자기와의 싸움 중이니까.
그런 남편이 집안일을 돕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열정적으로 가르치거나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승진하는 것도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고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알아서 자연스럽게 포기가 된다. 포기를 하고 나니 싸울 일도 없지만 재밌는 일도 없어졌다. 그저 그날그날 해야 할 일에 힘을 다해 충실하기로만 하니 그랬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늘 긴장하며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세 번째 나의 포기는 집안일을 나눠서 하는 이상적인 부부상 포기다. 그와 동시에 네 번째 포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열정적 사회생활 포기. 거의 모든 집안 일과 육아를 하며 열정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한 거니까.
남편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고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했다. 시작부터 사회생활에 쏟는 에너지는 그저 최소한으로 하고, 성공이나 열정은 버린 지 오래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다니는 직장을 선택했으니까 별 즐거움이나 기대도 없다. 하지만 충실하게 책임을 다한다.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희망이 가정뿐이었는지 간절하게 아기를 원했다. 전쟁 같은 나의 후다닥 삶을, 열정 없고 재미없는 삶을, 무겁기만 한 삶을 이해 못하는 남편이 미웠다. 더 아기를 바라는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난 둘째 아기를 낳기로 했다. 너무 마음이 무거웠으니까 행복의 씨앗이 필요했으니까 가정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행복하지 않은 남편과 살면 결과는 뻔하니까.
하나를 더 포기하기로 한다.
둘째 아기를 낳으며 나는 휴직을 했다. 이제 직장에 나가는 삶을 포기한다.
다섯 번째 포기였지만 잘됐다 싶었다. 더 이상 아이를 키우며 후다닥 사는 열정 없는 생활인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둘째도 낳고 전업주부로 빠듯하게 아침이면 아기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고 책도 읽어주고 키워서 어린이집도 보냈다. 정말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육아를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렇게 저렇게 느닷없이 찾아온 셋째 아이까지 운명처럼 키웠다. 일, 육아, 집안일을 동시에 하는 뜨거운 맛을 알았기에 일 하나만 빠져도 육아와 집안일은 참을 만했던 걸까?
더 이상 휴직을 할 수 없는 한계에 달했을 때 다시 직장에 복귀했다. 10년의 전업주부 생활에 지쳤을까 세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복 많은 사람이란 소문을 달고. 그렇게 일, 육아, 집안일을 또 감당했다.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으니 힘이 나기도 했다. 10년 전보다 조금은 여유 있게 외식도 하고 운동도 하며 아이 셋을 경제적으로 감당해야 하기에 그저 다시 일을 배우며 정년까지 하겠거니 하루하루 충실하려 했다. 그렇게 서서히 일이 몸에 익어가던 3년 후 어느 날 친정엄마가 느닷없이 부엌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
홀로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나는 직장을 또 접었다. 매일 우시는 아버지의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아버지와 삼시세끼를 해 먹으며 인생의 끝이 어떤 건지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생생히 겪게 되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일 년 만에 갑자기 말기 암으로 돌아가셨다.
나의 여섯번째 포기와 함께한 아버지와의 시간과 나 혼자만의 시간을 선물로 남겨주신 채.
아버지와의 시간 그리고 아버지가 가시고 난 후의 시간은
정신없이 후다닥 살아온 나의 일과 육아와 집안일의 그 시간보다 힘들기도 했고
사춘기 아이처럼 단 일년에도 수없이 성장과 변화를 겪게했다.
그건 인생에서 행복한 시간이 아닌 힘든 시간을 함께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이내 나는 알게 되었다.
내 삶의 포기에서 행복이 왔다는 걸.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은 행복한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힘든 시간도 있으며, 그 때를 같이 하는 것이 너무 힘들지만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준다는 걸.
단단한 관계 속에서 무언가 모를 이해와 깊이를 서로 느끼고 있다는 걸.
그 충만함이 내 생의 생명력이고 꽃임을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하는건가
그때의 포기들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었고
그 시기 시기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고 나의 한계가 있었기에 받아들였던 것뿐이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나는 전문직도 중요하지만, 가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하는 삶도 중요했던 거다.
가끔은 그 균형을 맞추지 못해 힘겹고 나 자신을 잃는 듯도 했지만, 그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행복이고 삶이라고 내 몸이 알고 있는 듯했다. 나를 사랑했지만 나의 주변사람들도 사랑하고 싶었다.
내가 꿈꾸는 행복은 반드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그 현실에서 균형을 잡아가려는 노력을 나는 포기라고 생각했던 거다. 내가 했던 포기들은 포기가 아니라 균형이고 선택이었다고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용기내어 이제 나 스스로 포기한다.
얼마전 난 당당히 퇴직을 신청했다. 이제 일을 포기하는 게 아닌 퇴직을 선택하는 것이며, 나의 이 시기에 맞는 다른 삶을 선택하고 지금보다 더 균형 있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지난 나의 포기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하지만 그 포기들로 인해 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내가 앞으로 하게 될 나의 선택을 기대하고 있다.
나에게 아직 설렘이 느껴진다.
나의 포기들은 나에게 씁쓸함과 애틋함만 남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나는 슬기롭게 포기해온 거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위해, 포기는 곧 선택이기에, 더욱 슬기롭게 포기하며 나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래도 가끔은 돌아본다.
나의 첫 번째 포기를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랬다면 나는 많은 포기들을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