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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풍 Oct 22. 2023

떠나거나, 바꾸거나, 받아들이거나(지금 선택하기)

내 인생의 선택들 지금의 선택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택한 순간을 떠올려 보면, 난 선택한 것보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어쩌면 선택이라는 단어보다는 포기라는 단어를 더 많이 떠올렸던 순간들이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택일까 포기일까?     


첫 번째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은 고3 때 대학 선택이다. 

집이 시골이었던 나는 혼자서 학교 앞에서 하숙하며 공부했다. 하숙집은 연탄불로 난방했다. 연탄 불구멍은 늘 닫혀 있어 몰래 열곤 해도 이상하게 항상 추웠다. 3년째가 되니 아침에 춥고 피곤해서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침밥은 차가운 도시락 까먹고, 추워서일까 잘 못 먹어서일까 마음도 몸도 꽁꽁 얼었던 걸까? 고3 막바지 어느 날 갑자기 허리가 아파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렇게 누운 채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두어 달 학교도 못 가고 누워서 EBS를 보다가 가까스로 일어나서 입시를 치렀다. 엄마는 장애인 되면 어쩌냐며 나를 붙잡고 울었다. 외할머니가 대구 어딘가에서 한약을 지어오시고, 큰 집에서 알려준 용하다는 약국 약이며, 병원 검사며 이것저것 다했다. 딱히 병명도 없이 허리뼈 모양이 약하게 타고났다는 의사의 말뿐이었다. 나는 일어서지 못하고 약국 약, 병원 약, 한약을 교대로 먹으며, 종일 누워서 밥도 먹고, 물도 먹고, 화장실은 벽을 짚고 간신히 갔다. 그렇게 석 달을 누워 겨울을 났다. 

친정도 없고, 직업도 없던 엄마가 아빠와 할머니한테 꼼짝 못 하고 숨 막히게 살며 여자도 꼭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딸들에게 자주 푸념 섞인 세뇌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들으며 큰 나는 서울로 가서 전문직을 갖겠다는 의지로 고등학교 3년을 말 수도 줄여가며 공부했다. 건강과 성적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학비 부담, 집안 재정 악화 상황, 그리고 딸이라는 조건으로 부모님의 날 이끈 방향은 전문직이 아닌 안정된 직장. 지방 의치대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제안으로 서울의 무난한 취업보장 국립대학을 갔다. 

그 후, 시간이 가고 스트레스가 줄면서 건강은 회복했지만, 대학 4년 내내 공부에는 흥미를 붙이지 못해 20대의 열정이나 배움을 찾지는 못하고 그저 방황하며 보냈다. 밖에서 보면 알아서 생활비 벌어 공부하는 국립대학 다니는 착한 딸로 살다가, 알아서 결혼한 무난한 맞벌이 월급 쟁이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의 선택이라기보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뭘 몰랐던 아이였던 게 늘 아쉽고, 딸이어서 그렇게 이끌어졌던 게 못내 서운하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배움의 열정을 갖고 싶고, 전문직 여성을 보면 맘이 꿈틀대는 건 그때의 아쉬움 때문일까 싶다.     


두 번째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은 결혼 후 3년째 어느 날이다.

어느 날 갑자기 배가 불편해서 병원에 간 남편이 갑자기 위암 3기를 선고받았다. 나는 첫아이 임신 5개월째 배불뚝이 새댁이었다. 느닷없이 차가운 병원 바닥 간병인 속에서 먹고 자고 울었다. 남편의 병원 침대에 걸려있던 이름표- 30세 암 남자 000-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은 딱 하나,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것뿐. 둘이 병원 도서관을 뒤져 온갖 암 관련 서적을 찾고 찾았다. 병원에서 하라는 건 수술과 항암 치료 후 예후를 지켜보는 것뿐. 위암 생존율 20퍼센트를 알려주고 그저 20퍼센트에 들기만을 기다리라는 건가?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그저 악몽 같은 기다림뿐인가?

책에서 본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례가 있었다. 생활방식을 완전히 180도 바꾸고 자연으로 가서 운동과 자연식을 한 사람들.

서울의 직장을 다 버리고 시골 친정 옆으로 첫째 아이를 배에 넣고 후다닥 이사를 왔다. 

시간은 흘러 그는 지금 낮잠을 자고 있다. 건강 검진을 하고 와서 녹초가 되어 누워서 내게 말한다.

“올해도 숙제를 또 했네.” 

아직도 가슴 졸이며 23년째 건강검진을 하고 결과를 기다린다. 결과지가 나올 때까지 항상 마음 한 켠에 돌덩이가 있다. 우리만 아는 그 돌덩이는 아마 평생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잠에서 깨면 밭에서 무를 뽑아 그가 손으로 벌레를 잡아가며 농사지은 고춧가루로 같이 김치를 담기로 했다.

나는 육수를 끓여놓고 마늘과 생강을 까 놓았다. 편안한 일상이다.

하지만 직장 생활과 자연식을 병행해야만 했던 철없던 30대의 버거운 삶은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늘 절박함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30대 젊은 부부가 알콩달콩 아기와 행복해 보이면 뭔가 마음이 꿈틀대고 시리며 쉬 눈물이 난다.     


세 번째 선택할 수밖에 없던 순간은 아이들을 낳을 때이다.

암은 5년 생존을 중요하게 본다. 그건 병원에서 5년 지나면 완치 판정이란 단어를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의사들이 자기가 암에 걸렸을 때도 5년 후 완치라고 믿을지 그건 의문이다. 남편의 암 발병 후 5년쯤이 지나고 직장도 다시 가고 평범한 삶이 가까워졌을 무렵, 아이 하나 키우며 직장 다니기도 버거웠던 시기, 갑자기 정관수술을 다시 복구하겠다며 혼자서 병원에 입원했다. 둘째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기는 불행하고 이혼하고 싶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어서 일 년쯤을 싸우다가 이내 내가 휴직하기로 맘먹고 아기를 낳았다. 지금은 집 앞 체리 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내 남편도 저랬던 건가? 

체리 나무가 올해 유난히 병충해가 심해서 거의 잎이 떨어져 죽을까 걱정이었다. 그런데 가을 어느 날 가지에 꽃이 피었다. 봄도 아닌 가을에 왜 꽃이 피지? 나무는 죽음이 가까우면 스스로 엄청난 꽃을 피운다. 다음 세대를 남기기 위해서. 알 수 없고 엄청난 본능의 힘.

둘째를 낳고 4년 후 다시 운명처럼 우리에게 또 꽃이 피었다. 완벽한 피임을 뚫고 나온 셋째 아기. 처음엔 울었고 딱 일주일을 고민한 후, 난 직장을 또 쉬고 아기를 선택했다. 나도 내 선택이 놀랍다. 본능이 생명을 선택하게 한 걸까?  그렇게 난 세 딸의 엄마가 되었다.

내 입장에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직장 일과 가정일과 자연식 세 가지를 병행하며 이미 지칠 대로 지쳐본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육아와 집안일에 피로가 쌓이면 늘 남편과 아이들에게 짜증이 향한다. 왠지 모를 억울함에.     


네 번째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때이다.

어머니가 느닷없이 하루 만에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는 밥을 잘 드시지 못하고, 잠도 못 주무시며 슬픔에 외로움과 괴로움이 버무려져 우울증 무기력증 상태에 지병까지 있었다. 직장에 복귀하고 세 아이를 키우던 나는 직장을 쉬고 아버지와 삼시 세끼를 함께 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 아버지의 가장 나약하고 괴로운 시간을 함께하는 건 상상해 본 적 없는 힘듦이었다. 내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보다 암에 걸린 남편을 견디는 것보다 날이 갈수록 진이 빠지고 머리가 띵했다. 즐거움이나 생기는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생기가 사그라드는 일.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난 인생의 마지막 단락을 생생하게 아버지와 함께 겪었다. 그저 견디고 견디며 열심히 했다. 삼시 세끼 봉양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막내지만 옆집에 살던 내게 그건 운명이었을까 선택이었을까?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가 어제처럼 생생하고, 그때 일어났던 부모 형제와의 갈등과 책임, 질병과 죽음에 관한 일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기력을 너무 끌어내 쓴 걸까? 한 일 년을 원인 없이 아파 한약을 달고 살았다.

약해진 나의 몸으로 생각이 자꾸만 도달하는 곳은, 나의 남은 삶과 죽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세 가지로 정리하면 이렇단다. (by 팀 페리스)

떠나거나, 
바꾸거나, 
받아들이거나.     

난 지금까지 받아들이고 견디는 선택을 한 거 같다. 

어쩌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우연히 언니와 갔던 점집에서 점쟁이 할머니가 내게 한 말이 있다. 

 “몸이 아픈 게 숙제가 될 게야”

정말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삶이 흘러가는 강물이라면 그 물줄기와 함께 흘러가는 내 인생을 어쩔 수 없는 게 운명일지도 모른다. 

바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누군가가 아프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

그 커다란 물줄기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그저 받아들이고 견디는 게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누구에게나 그 강물의 흐름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함도 안다.     


오늘 나는 많은 선택을 했다.

이제는 선택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선택 말고, 내가 하는 선택을 한다.

취소 버튼을 누를까 자기 전까지 고민했지만, 아침이 되어 필라테스를 가는 선택. 주 3회 밤마다 같은 고민을 하지만 취소버튼을 참는 선택 오늘로 63번째다. 

‘나와 가족을 따라다니는 질병이 나의 숙제라고 했지? 그래 숙제해 보자.’

배 부들부들, 다리 부들부들 떨며 굽고 휘어진 몸을 호흡에 집중하며 애써 조금씩 편다. 등줄기에 땀이 한줄기 주르르. 오늘도 해냈다.

밭에서 무를 뽑고 대파를 뽑아 김치를 담는다. 지난주에 담은 오이지는 새콤하니 잘 삭고 있다. 친구와 나눠 먹을 요량이다. 내가 낳은 세 딸과 그의 밥을 고슬고슬 짓는다. 23년째. 

오늘은 하루 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글을 쓴다. 글을 쓰며 기어코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을 기억해 냈다. 다음 주엔 퇴직 신청서를 낸다. 퇴직하고 할 새로운 일들을 구상하자니 솔솔 재미가 난다.

다음 명절에는 집안일과 삼시 세끼에 지쳐 짜증이 날 때쯤 한 이틀 유유히 혼자 여행을 떠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음악을 들을 숙소를 찜해 두고 여행 폴더에 넣어둔다. 

마당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골라 정원 폴더에 담아놓는다. 선물 받은 화분도 매번 죽이던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찾으러 식물원에 간다.

설레는 마음이 살살 올라온다. 어쩌면 연애할 때 이후 느껴본 설렘이다.

가파른 강물의 흐름을 지나온 후에야 잔잔한 강물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끼는 것이 인생의 상인 건가?     


  이제까지는 가파르게 흘러가는 강물을 받아들이고 견디는 선택을 해 왔으니, 오늘 지금 이 잔잔한 강물일 때 나는 떠나고 바꾸는 선택을 하고 있다. 맘껏 설레기 위해. 가파른 강물의 흐름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 오늘 나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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