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짝사랑이라는 굴레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불현듯 고백이란 걸 해버리고 말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지만 말이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청춘이라는 말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그러니까 10대라던지 20대라던지 하는 나이엔 고백이란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것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날들엔 관계에 대한 회복력과 내 마음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꽤나 높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보게 되면 보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라며 다소 뻔뻔한 감정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은 30대의 짝사랑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건 똑같지만 체력이 예전만 못하여 속력이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더 오래 쉬어야 했고 더 많은 수분을 보충해 주어야 했다.
고백이란 걸 하지 않는 편이 모두를 위한 배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는 사실 이런 말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으나 사람이란 게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알게 되고 뭐 그랬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조금씩 변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면서 마음에 별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이 참 많은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됐다. 짝사랑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짝사랑하는 것처럼 선한 마음을 마음에 품게 됐다.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상대를 그리며 별이라니, 꿈이라니 하는 것들을.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을 , 감히, 유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어주는 별이 나의 꿈같은 사람이 고마울 뿐이었다.
고백하지 못해 슬픈 마음보다 그 이후 알 수 없는 불확실함에 마음 졸이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감정이 될지도 모르고,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도 못한 상대에게 내 마음 편하자고 고백이란 걸 불쑥한다는 것도 이젠 욕심이란
생각을 한다는 거다. 그의 일상을 함부로 깨트려버릴 권리까지는 나에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서로를 짝사랑하든 뭐든 내 감정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지켜주는 배려라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을 통하여 배웠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매일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걸 나는 문득 인식하곤 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미 내가 알기도 전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어준 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