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이번 가족여행은 작년과는 다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짐부터 가볍게 쌌다. 종일 무거운 가방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여분의 옷도 많이 넣지 않았다. 노트북을 챙길까 한참 고민하다 그냥 집에 두고 가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강의가 있는데 호텔에서라도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한다. 디피랑 저녁 여행을 포기해야 한다. 강의를 빼먹는 건 드문 일인데, 대단한 각오다. 여행까지 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게 맞나 싶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의 짐을 만들지 말자. 이건 참 잘한 결정이었다.
책을 한 권도 들고 가지 않았다. 여행 때 책을 들고 가지 않다니!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읽지 않아도 습관이었다. 가방에 책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해서 화장품은 없어도 책은 만날 들고 다녔었다. 여분의 옷, 노트북, 책을 빼고 나니 가방이 텅 비었다. 저녁 날씨가 어떨지 몰라 바람막이 잠바만 챙겼다. 너무 추우면 콧물이 줄줄 흐르기 때문이다.
올해는 아이가 모든 일정을 짰다.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일정을 아이가 맡기로 했다. 딱 한 번이지만 작년에 다녀왔으니 아이가 알아서 노선을 짤 수 있겠다 싶어 다 맡겼다.
"나는 너만 믿는다."
버스 노선이며 움직이는 동선이며 나는 걱정할게 하나도 없었다. 한 번 다녀온 길은 잘 기억하는 아이의 특별한 성향이 이런 때는 최고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나는 너만 믿고 간다." 빈 말 아닌 참 말을 했다. 내 주장을 하지 않고, 아이를 따라 응해주니 구시렁거리는 것도 없다. 다리 아플 것을 감안하여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다리가 아플 만큼 되면 쉬어갔다.
작년 첫 여행에서는 모든 노선을 내가 짰다. 도서관에 가서 통영 여행서적을 여러 권 펼쳐놓고 아이에게 좀 보라고 종용했지만 아이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여행 책을 가방에 잔뜩 넣어 길을 걷다 다시 보고, 구글을 켜놓고 통영 시내를 걸어 다녔다. 아뿔싸, 구글 지도가 잘 안 먹히는 도로도 있었다. 분명 구글에는 도로로 표시되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구글 믿고 그대로 걸었다가 충렬사에서 세병관으로 이동할 때 헛걸음을 했다. 엉뚱하게 한참 올라갔던 길에서 세병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없었다.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곳이 세병관 같은데 길은 구글에만 있을 뿐 담을 뛰어넘어 길을 만들지 않는 이상 실제 세계에는 그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왔던 길은 다시 내려와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 길을 찾아 돌아가면서도, 이번 길은 맞나 불안한 마음으로 골목길을 걸을 때였다. 엄마는 운전도 못해서 이 고생을 시키냐고 아이의 온갖 짜증이 시작됐다. 남들 다하는 운전을 못해서... 겁이 많아 고속도로를 못 타는 엄마를 원망했다. 가방은 무겁고 다리는 아파 죽겠는데 돈 아깝다고 택시도 안 타고, 운전도 못해서 렌터카도 안 하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빴다.
올해는 두 번째이니 아이에게 미안한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좋지도 않은 똑같은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아니, 우리 여행은 이제 툴툴거리며 억지로 떠나고 고생하고 힘든 기억으로 되돌아와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좋은 추억을 위한 여행이니까 말이다.
방문하는 곳마다 학습을 강요하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 놓치지 않고 방문하는 곳마다 다 읽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내 여행 취향은 그랬다. 새록새록 배우는 기쁨이 나는 참 좋았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강요된 학습이었다. 다리도 아픈데, 엄마가 읽어라, 봐라 계속 잔소리를 해대니 아이는 별로였다. 읽는 것도 어려운 아이에게 어차피 다 잊어버릴 텐데 그냥 제목과 그림만 보라고 하면 될 것을... 딱 보고 싶고 인상 깊은 것만 골라 보라고 해도 되었을 것을... 그딴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무조건 다 읽어보고 나처럼 감동을 받아! 나는 아이도 내 취향이길 바랐다. 안 되는 아이에게 부모의 강요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다는 것을 이제 나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떤 엄마는 나에게 '그러면 안 되지, 포기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 시켜야지.'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의 학습 한계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은 천재 수준이지만, 관심 없는 것은 상식 수준도 되지 않는 것은 아이의 뇌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을 초과한 과다한 학습이 뇌전증을 가져올 수도 있고 틱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어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다리가 아팠던 이유는 또 있었다. 음식에는 별 관심도 없던 나였는데 맛집 가서 먹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얼마나 맛집 가는 길을 헤맸던가. 인터넷 평을 보고 그렇게 갔는데, 맛집이 참 별로였다. 그 한 물 간 맛집, 이름도 까먹지 않는다. 그렇게 엄마 마음대로 하다 보니 아이랑 조금 티격 대격했었다. 맛집, 다 거기가 거기다. 블로그 홍보글에 호구되지 말기로 했다.
올해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처음이 아니라는 게 참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아이가 모조리 알고 있었지만 통영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나도 대충 생각이 났다. 정류장, 선편, 맛집... 대강이라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엔 재촉하지 않아도 되었다. 느긋한 시내 걷기가 가능했다. 일부러 또 다른 맛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간판마다 TV에 나왔었다는 집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냥 지나쳐야지, 광고에 속지 말아야지 해도 역시 눈길을 끌었다. 이번에도 통영 꿀빵을 먹었다. 달달한 게 참 맛있었다. 작년에는 암 것도 몰라서 10개 한 박스만 사야 하는 줄 알았다. 너무 달아서 열 개까지 먹고 싶지 않았지만 박스 채 구매했었다. 사고 나서야 낱개 구매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이런 사소한 경험 때문에 올해는 오천 어치만 샀다. 여러 가지 맛을 시식하고 아이가 좋다고 하는 팥 꿀빵과 유자 꿀빵만 골라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