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같은 동심의 세계

디피랑 디지털 숲

by 조이스랑

디피랑 가는 길


서호시장 외곽 바닷길을 따라 중앙시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짐이 없어서 그런가. 다리도 안 아프고 걸을 만했다. 아이에게 디피랑 가는 길을 아냐고 물었더니, 저 바다 건너 언덕 위 산기슭에서 반짝이는 화려한 조명을 가리킨다. 지도 앱을 켰는지 시립 회관 옆이 디피랑 같다고 안내한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만 있으면 딱인데... 우리는 휘돌아 가야 한다. 꽤 멀어 보이는데... 아이는 전혀 구시렁 대지 않는다. 저녁을 잘 먹어서 그런가. 아빠를 만나 수다를 떨며 걸어서 그런가. 자신이 모든 걸 안내하고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어서 그런가. 이유가 뭐든 이렇게 오래 걸어도 불평하지 않는 아이가 대견할 따름이다.


나 역시 다리는 아프지 않다. 하지만 같은 길을 걷자니 달콤하지만은 않다. 아이와 투덜거리며 마지막 코스로 걷던 이 바닷길이 따끔따끔했다. 김춘수 기념관에서 해저터널을 지나 통영 광장 앞까지 걸었다. 바닷길이라도 보려고 골랐던 노선인데 호텔 앞바다와는 풍경이 달랐다. 호텔 앞 바닷길은 잘 다듬어진 길에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와 걷기만 해도 힐링이었다. 반면 시장에서 시장으로 이어지는 이 바닷길은 스트레스였다. 바다는 볼썽사나운 낡은 가벽과 배가 다 가렸고 길은 울퉁불퉁한 데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차량을 조심하느라 걷는 것도 불안하기만 했다. 또 어찌나 자주 물을 마셨던지 깨끗한 화장실만 만나면 꼭 들러야 했다. 신체적 대비를 미리 하지 않고는 어디서 또 화장실을 찾아야 할지 몰라 불편까지 합세했다.


광장 앞을 지나면서 남편은 이런 데가 있냐며 ‘멋진 광장’이라며 감탄한다. 남편은 아픈 곳을 찌르는 내 기억을 짐작도 할 수 없으리라. 작년 11월 여기 광장 화장실에서 아이와 투닥거렸다. 겨우 만난 화장실에서 저녁 추위에 옷을 껴 입으라 난리였다. 다리가 너무 아파 그만 걷고 싶었지만 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버스가 다니는 주요 도로가 아니어서 그랬다. 검색을 해봐도 잘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검색을 포기하고 무거운 다리를 끌며 중앙시장으로 나갔다. 집으로 갈 마지막 버스를 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다. 시외터미널에서 마냥 기다리는 게 싫어 일몰이라도 보자고 아이를 꼬드겼다. 그렇게 터미널과 정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일몰을 보려면 한두 정거장 더 갔어야 했는데 초행길이니 잘못 하차를 했다. 일몰은커녕 이름 모를 항구 앞에서 다시 역방향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버스가 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참 바보 같았다. 그냥 택시를 타지 그깟 돈 몇 푼 아끼려고... 낯선 여행지에서 나 자신이 참 한심했다. 씁쓸한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광장을 걷는데, 아이와 남편은 계속 즐거운 수다를 떤다.

다행이다. 올해는 그런 무식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일몰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이런 시장 후미진 곳에 버스가 없다는 것도 알고, 호텔에서 쉬었다 나와서 다리도 덜 아프다. 꼬부라진 이 바닷길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도 않는다. '다 지나간 일이야. 오늘은 달라. 그런 멍청한 짓은 다시는 안 해.'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도움 되지도 않는 잡생각을 떨어 버리고 식구들을 따라 걷는다.


저녁 프로그램은 디피랑이다. 아이가 타고 싶어 했던 케이블카가 휴장 중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케이블카 대신 디피랑으로 프로그램이 바뀐 게 케이블카 휴장 때문인가 보다. 다행이다 싶었다. 휴장인지 모르고 하마터면 케이블카 타러 갈 뻔했다. 헛수고할 뻔했다. 엄마가 케이블카 안 태워줬다고 아이 마음 상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다행이다. 남망산 언덕배기가 가파르게 보여도 남편과 아이는 디피랑 가는 길을 확신하며 걷는다. 허벅지 뒷부분에 자극이 올만큼 가파르다. 그래도 걸을 만하다. 저녁 소화가 잘 된다. 탕수육, 해물짬뽕, 기름진 걸 먹었는데 불렀던 배도 슬슬 꺼진다. 남편은 좀 힘들겠다. 가방도 있고 워낙 평상시 운동을 하지 않아서 다리가 아플 거다. 그래도 남편은 아무 내색이 없다. 호텔 가서 야식 먹으면 된다며 남편과 아이는 죽이 잘 맞는다.


디피랑 관람 때문인지 저녁 7시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남았는데도 우리보다 일찍 와 줄 선 사람들이 꽤 있다. 야광 볼을 하나씩 손에 쥐고 있는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7시에 입장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7시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아직 멀었나? 방역 체크는 다 했는데 언제 열지? 궁금하던 차에 안내원에게 물으니 7시 50분부터 매표란다. 분명 7시로 안내받았는데 착오가 있었나 보다. 디피랑 개장 시간은 9월에는 8시이고 10월부터 7시란다. 내가 받은 안내장에는 7시라고 되어있었는데 다시 한 시간을 더 기다리려 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늦게 올 걸. 노트북 안 가져온 게 천만다행이다. 숙소로 돌아가면 9시가 훌쩍 넘는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강의였잖아. 일찍 도착한 것도 모자라 시간 착오까지 더해 1시간이나 또 기다리는 게 지루한 건 아이도 마찬가지다. 남편더러 줄 서 있으라 하고 아이랑 나는 몸을 비비 꼬느니 움직이는 게 나아 갈래길로 산책을 나갔다 왔다.

마법 같은 동심의 세계, 디피랑 디지털 숲


괜히 일찍 왔다고 투덜거린 건 다 디피랑이 얼마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줄 모르고 하는 생각이었다. 시립 회관 외벽에 쏘는 화려한 인공조명을 보며 기다리니 해가 떨어지고 통영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밤바다와 반짝이는 조명이 만들어낸 야경은 서포루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다른 구경거리다. 서호시장부터 중앙시장을 거쳐 쭉 걸어 올랐던 길 뒤로 화려한 야경이 펼쳐졌다. 작년에는 저녁 시간 내내 호텔에만 있었으니 정 반대편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야경은 감상할 수 없었다.


디피랑은 남망산공원에 위치한 국내 최장 야간 디지털 테마파크로 빛과 인공조명을 활용한 15개의 테마 산책로가 있다. 남망산공원의 기존 모습을 보존한 채 야간 경관을 변화시켜 많은 시민들이 찾는 야간경관 명소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뒤로 늘어선 줄이 길어졌다. 디피랑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갔는데, 아이들 동심 세계에 딱 좋은 빛의 전시회 같았다. 숲 속에 조명을 쏘았다. 동화처럼 숲이 마법을 부렸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인데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요정 나왔다 사라졌다. 어른 마음도 혹하게 하는 모든 연출이 가능했다.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탄성으로 가득했을까. 거기엔 음악도 한몫했다. 테마 산책로를 따라가면 신기한 요정의 나무가 나타난다. 우주 공간도 펼쳐진다.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폭도도 있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아래 심연까지 들어가 이름 모를 해저 식물과 물고기를 만난다. 한꺼번에 휙 바람을 타고 퍼지는 은빛 나무들, 그 앞을 지나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다.


이런 디지털 테마파크가 동탄에도 있으면 대박 나겠는걸. 같은 공간을 밤에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시키다니. 다원이음터 옆 숲에 다원포레스트, 괜찮겠다. 하지만 환경단체는 정말 싫어할 거야. 맹꽁이 서식지이며 작은 도마뱀도 나오는 숲인데 말이다. 나도 활동가이니 어쩔 수 없다. 스쳐가는 생각으로만 둔다.

비상용으로 챙겨간 바람막이도 딱히 입을 일이 없었다. 다 같이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섭섭하지는 않았다. 다들 가족 나들이 왔는데 중간 흥을 깨며 누구한테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감탄하면서 디지털 테마 속 주인공이었으니까. 얼마 만에 느껴본 감탄이던가. 아이들은 대부분 반짝거리는 야광 볼을 쥐고 있었다. 나라면 우리 아이에게 사주었을까? 만 원이나 한다면서 잠깐인데 비싸다고 안 사주었을까.


“예쁜데 나도 하나 살까?” 남편에게 말했더니, 의아한 표정이다. 여행도 많이 안 다녔지만 딸아이에게 예쁜 옷과 가방은 물론, 이런저런 한순간의 사치품을 나서서 사준 기억이 별로 없다. 조르고 조르는 딸에게 지칠 만큼 지칠 때가 되어서야 마지못해 사 주었다. 무슨 개똥철학이었을까.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 핸드폰을 초등 5학년 말이 되어서야 사주었다. 나만 없다고 얼마나 서운해했을까. 엄마로서 좋은 기억은 아니다. 이번 통영 여행 같이 가면, 5만 원까지 준다고 했는데도 딸은 거절했다. 수행 평가가 걸린 발표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전에 수행평가가 끝나면 모를까 3시 넘어서 평가가 끝나니 1시 출발하는 아빠랑 시간 맞춰 가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이제 와서 나는 무슨 생각인가. 고등학생 딸에게 수행평가보다 가족여행 가자고 하니 말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즐거운 순간을 켜켜이 쌓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지. 우리 가족의 행복한 순간. 다음 달에도 만드는 거야. 딸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혼잣말이다.

디피랑 구경을 다하고 나왔더니 여전히 줄어들 줄 모르는 긴 줄에 아직도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래서 미리 미리 와서 줄을 섰나보다. 언제 와도 한 시간 이상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도 동심에 빠져들었더니 마음까지 젊어진 기분이다. 가파르게 올랐던 길을 가뿐하게 내려왔다.


행정상 통영시이긴 하지만 시골이라 역시 9시가 넘어가니 낮에 그렇게 많던 버스가 많이 줄었다. 20여분을 기다려야 한다. 혹시 서호시장까지 가면 버스가 더 많을까. 오늘따라 디지털 버스 안내판이 고장 나 버스마다 다 종이로 행선지를 붙여 놓았다. 밤이 되니 종이가 잘 안 보인다. 중앙시장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고 나니 쌩하고 지나가는 버스가 참 많다. 우리 앞을 스쳐가는 버스는 다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 아니었을까 괜한 아쉬움이다.


“아니야. 아까 버스 안내판에 백 번으로 시작되는 건 한 대 밖에 없었어. 우리가 탈 버스 아냐.” 아이는 확신한다. 중앙시장에서 서호시장까지 걸었다. 남편은 분명 피곤하고 다리가 아플 거다. 서호시장에서 택시를 탈까 했지만 택시가 그리 많이 눈에 띄지도 않는다. 카카오 택시 앱도 생각나지 않았다. 귀찮다. 앱 까는 것도 귀찮다. 그냥 속 편하게 버스를 타기로 했다. 시골도 늦게까지 공부시키는 학원이 많은지 간간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하기야 아직 10시도 채 되지 않았다. 심심해서 다리 운동을 한다. 생각해보니 오늘 땡땡이를 두 개나 쳤다. 운동 수업도 패스, 인디자인 수업도 패스. 빠진 건 다음에 보충하는 걸로.

100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호텔로 올라가는 길, 낮에 내가 했던 생각을 남편도 하는 듯 같은 말을 한다.


“이런 데가 호텔 가는 길이야?”

“여기가 길이 좀 그래. 그래도 금방이야.”

시골 뒷골목을 걷다 도착한 숙소는 기대 이상이다. 아빠와 아이는 야식을 위해 편의점 먼저 들러 라면과 과자를 챙기고 즐겁기만 하다.

배정받은 방이 오션뷰이긴 했지만 낮은 층이라 풍광이 별로인가 했더니, 밤하늘에 둥그렇게 뜬 달빛이 바닷물에 반짝이는 게 신기할 만큼 훤히 펼쳐져 기대하지 않은 기쁨을 준다. 마치 은하수의 모든 별 빛이 은빛 바닷물이 되어 내 앞에 쏟아 든 것만 같다. 이건 고층과는 또 다른 통영 바다의 아름다움이다. 디지털 불빛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준 찬란한 별빛이다. 이런 풍광을 카메라로 담을 수 없으니 마음으로 담아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목숨 건 전쟁이라니.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조선 백성 세 명 중 한 명이 죽었다던 임진왜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갖은 목숨을 내놓았던 통영 앞바다, 조선군선의 비장함이 이 밤 달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산도 제승당 앞에서도 달 밝은 밤이면 이런 달빛이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장군은 깊은 감탄 대신 시름을 하셨다.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 달빛 아래, 한 위인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생각한다.


마법같은 동심의 세계도 다녀왔지만, 위인의 마음도 돌아볼 수 있고, 가족과의 관계와 소통 방식을 돌아보는 통영 여행은 올해도 성공이다. 내년에 다시 또 와야지, 다음에 또 시간을 내어 가족 여행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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