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작 첫 수업
이승후? 이승우? 최진영, 정유정, 한정연? 한정현? 손원평, 정지하? 정지아?? 소설 창작반에서 작가와 작품명이 호명될 때마다 작가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할 만큼 역시 내가 알고 있는 현대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작품은 말할 것도 없다. 문득 나만이 가장 엉뚱한 교실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내가 이 수업이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뭐 어때? 소설책 한 권 안 읽어본 무식한 사람은 이런 수업 들어선 안 되는 거라도 있나? 혼밥이 생소했던 1980년대, 시골에서 막 상경해 시립도서관 다닐 때 도시락 먹는 시간이 가장 불편했던 그때처럼, 뭐 어때? 누가 뭐 나를 보기나 하나? 내가 혼자 먹든 말든 아무도 상관 안 할 거야.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을 거야. 세뇌용 멘트를 되새김질했다.
신학생이 작가가 되어 썼다는 <생의 이면>이 찐한 소설이라는 얘기를 듣자 책 보다 작가가 끌렸다. 아무나 신학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한몫했지만 신학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택한 작가라니. 신을 저버린 그 용감한 자가 그 허탈한 마음을 어떻게 글로 풀어냈을까, 신을 다른 책에서 더 열심히 찾고자 한 그는 글로 다시 구원받았을까 궁금했다. 강대상 위에서 말씀을 풀어 직접 구원을 선포하지 않고 글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데 알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독자를 그는 얼마나 구원했을까. 명령받고 싶지 않아 직설적 설교를 못 마땅해하는 이들을 은유와 비유, 함축으로 부드럽게 녹여내 저절로 신을 찾게 만들었을까.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기에 다른 모든, 생소하고 훌륭한 작가와 작품을 제쳐두고, <생의 이면>을 가장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막 <리어왕>을 읽고 난 후라 <생의 이면>은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파격적이지 않았다. 이야기의 앞부분에 소개된 차꼬 찬 이의 이미지는 어디서 읽은 듯한 한 장면 같기도 해서, 쉽게 이 사람이 주인공의 아버지이겠군, 분명히 미친 거라서... 이야기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었다. 탁월한 작가는 독자가 이야기를 예측하게 하다가 그 기대를 저버리게 해 반전을 준다고 했던가. '나를 우롱하지 마.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어? 너는, 너는....... 너는 창녀야!' 성스러운 여자를 창녀라고 불러버린 그 문장이 가장 파격이었다. 박부길이 불쌍해지다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아? 나도 글 속의 한 무리처럼 저절로 어이없고, 생뚱맞은 욕에 화가 치밀었으니까. 아니, 박부길이 잘 되었으면 했는데 그도 이제 마침내 자기 아버지처럼 미쳐버리는 거야? 의처증의 시작인 거야? 했으니까. 이 사건 이후 진행된 마지막 부분이 가장 큰 반전이었고 그래서 아름다웠다. 그랬다. 그 욕 사건 후 여자가 떠나자 그는 빛을 잃었다. 빛이 내리쬐는 신학교를 떠나 고등학교 시절의 그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어두움이 빛이 되어 써낸 [지상의 양식]. 그렇게 그는 작가가 되었다. [지상의 양식]은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까?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수의 초록 초록한 빛에 눈이 부시다. 찬란하고 아름다워 저절로 눈길이 간다. 참 예쁘다. 참 싱그럽다. 진부하지 않은 다른 말이 필요한 순간이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신은 어떻게 이렇게 멋진 아름다움을 잎새 하나하나에 완전하고도 다른 모습으로, 비쳐오는 태양의 빛을 받으며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한 번 불어오는 바람에도 산들거리며 펼쳐지는 그런 아름다움을, 완벽한 동영상의 풍경으로 숨겨 놓았을까. 그런 감탄을 박부길은 어린 시절 배울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부분에 밑줄 긋지 않아도 아주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는 참 눈이 부시다며 찬란하게 길을 걸으며 행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만 겹의 자연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 구원으로 가는 인생의 길은 만 겹이다.
#수업에서 나눈 이야기
자기 소개, 수업에 참여한 이유
수업 미션, 소설 창작, 무조건 쓴다
다음 시간, 첫 문장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