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Aug 17. 2020

#1. 벌의 무릎 (Bee's Knees)

B-612 소행성의 주인, 어린왕자를 기리며.

이상주의

국제정치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상주의, 현실주의 등의 단어 낯설진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상주의 (또는 자유주의)' 인간은 어느 정도 이롭다고 보는 사람들이 정립하고 발전시킨 개념으로 국제연합(UN)과 같은 국제기구 탄생을 뒷받침한 이론이다. 세계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라고나 해야 할까. 이상주의에 대치되는 개념인 현실주의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는데,  힘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 또는 국가가 절대 우위에 있국가 간 타협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둔다.


내가 갑자기 이상주의니 현실주의니 들먹이는 이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과 환경에 따라 사상 또는 생각이 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의 항복, 현실주의의 지배

꿈을 쫓기 위해 울타리가 되었던 가족의 품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간, 서유럽의 섬나라, 영국. 그곳에서 나는 꿈을 꾸며 - 때로는 실망하고, 버거웠던 적도 많았지만 - 살았다.


노리치에서 내가 살던 플랫(flat)은 베네딕트 성인의 길(St Benedicts Street) 중간 즈음에 위치한 카페 바바붐(Cafe Vava Voom)- 불어로 부릉부릉이란 뜻 - 위에 있는 8평 남짓의 작은 스튜디오였다. 억지로 샤워실과 화장실을 끼워 넣은 듯한 구조와 잊을만하면 형형색색의 꽃을 피우던 곰팡이 벽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야 했지만, 베네딕트 성인의 거리 62A지(62A St.Benedicts)는 나의 하루, 일 이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분신과도 같은 곳이었다.

내가 살던 스튜디오 뒤 St. Gile's Road에 있는 성당

월, 화, 수, 목, 금요일 오전 7시, 커피 그라인더 소리에 맞춰 기상했다. 집을 나서면 바바붐 카페 주인 데미안(Damien)아저씨 거의 매일 공짜로 선사한 안티 아메리카노(Anti-Americano, 그는 정말 전형적인 프랑스 인이었다.)를 마시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거의 매일 4km걸어 학교에 갔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이면 나는 도서관으로 직진하여 2층 오른쪽 맨 끝, 영롱한 햇빛이 어루만진 물결이 왈츠같이 고상한 춤을 추던 호수의 잔잔한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는 그 자리를 내 자리로 칭해 앉곤 했다. 


그 자리에서 난 마치 허기진 듯 언어학 책, 심리학 책, 기호학 책,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꿀꺽꿀꺽 삼켜 체할 정도로 많은 책을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생텍쥐페리(Antoin de Saint-Exupery)의 책은 모조리 읽었다. 20세기 초, 비행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에어프랑스(Air France)의 전신이자 국제우편물 전문 화물 비행 업체인 에어로포스탈(Aeropostale)에서 파일럿으로 근무하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고독한 비행사-생텍쥐페리 본인-의 생각과 관념을 투영한 그의 초기의 작품들에 나의 마음과 두 눈을 집중할 때면 인간의 숭고함을 시처럼 느낄 수 있었다.

2008년 6월, 생일 기념으로 여행했던 리옹(생텍쥐페리의 고향)

불과 10-15년 전만 해도 나는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기대와 이상향을 꿈꾸며 내일과 내년이 기대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안락함에 항복하고만 볼품없는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실에 항복하여 오늘 밤도 기다려지지 않는 재미없는 그런 어른. 생텍쥐페리의 명작인 '어린왕자' 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못생긴 모자로 바라보며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해서 가치를 가려내는 그런 어른 말이다.  


다시 국제정치의 개념을 들먹이자면 나는 투쟁을 거부하고 두뇌의 피곤함을 애써 피하는 무미건조한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과거의 내가 떠오르는 Bee's Knees

나는 이렇게 한심하고 대세에 편중되어버린 엉성한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지만, 꿈꾸던 과거의 나를 찰나에 마주할 수 있는 금빛의 칵테일은 바로 Bee's Knees - 어색한 번역을 해보자면, 벌의 무릎 -이다. 


이 칵테일은 마셔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꿀의 달콤함과 레몬즙의 상큼함 그리고 드라이 진의 떫고 쌉싸름함이 오묘하게 어우러진다. 한잔으로 부족한 그런 맛과 분위기.

 

이 칵테일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채 실시한 금주령(1920-33년대) 시대에 만들어졌다. 금주령은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기 클래식이니 모던 클래식이니 하는 유명한 칵테일이 탄생했고, 스픽이지 바(Speakeasy bar),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플래퍼(flapper)-영한사전에는 불량소녀, 날라리로 번역하고 있는데, 단발 보브컷에 민소매 드레스를 걸치고, 길고 섹시한 담뱃대를 입에 물며, 남자들과 어울려 술을 양껏 마시던 금주령 시기 서양의 여성상을 의미- 등 시대의 아이콘이 만들어진 중요한 시기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무엇보다도 Bee's Knees는 금주령 시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자주 거론되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Bee's Knees는 가정집에서 불법으로 제조해서 마셨던 배쓰텁진(Bathtub Gin)의 엉망진창인 맛을 꿀과 레몬즙으로 희석해서 마시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 이 배합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프랑크 메이어(Frank Meier)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바텐더인데, 그가 근무했던 파리의 리츠(Ritz) 호텔에서 오렌지 주스까지 가미해 손님들한테 대접했던 것이 이 칵테일의 시초다. 그 후 약 20년 뒤, 미국의 변호사이자 20세기 모던 클래식 칵테일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엠버리(David Embury)라는 자가 오렌지 주스를 빼고, 허니 시럽(Honey Syrup)과 레몬즙의 비율을 드라이 진의 1/3으로 줄여서 재정비한 레시피가 오늘 우리가 바에서 흔히 접하는 Bee's Knees 이다. 이 배합은 1948년에 소개되었는데, 금주령 종식 후 만들어진 진(Gin)들은 이미 상용화되어 퀄리티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나름 괜찮은 진을 레몬과 허니 시럽으로 망치는 것은 멍청한 짓이기 때문에 단맛을 내는 재료를 최소화한 것으로 추론된다.


나는 자카르타에 있는 래플스 호텔의 라이터스 바(The Writer's Bar of the Raffles Hotel Jakarta)에서 Bee's Knees를 처음 마셨다. 타자기와 봉인 도장(seal)으로 실내를 꾸민 이 곳. 고전소설을 쓰던 20-30년대 작가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 바에서 말이다.

The Writer's Bar, Raffles Jakarta


몽키 (Monkey 47)

몽키 47 (출처: Difford's Guide)

독일 남서 지방 블랙 포레스트 숲(Schwarzwald)에서 탄생한 이 진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서 조금 더 상세히 소개할 계획인데, 이 진은 인도에서 공군 장교로 일하던 몽고메리 콜린스(Montgomery Collins)란 영국인이 만들었던 레시피를 기반으로 세상에 나온 진이다. 독일을 대표하는 드라이 진이기도 하다. 인도가 연상되는 왕관을 쓴 원숭이와 블랙 포레스트에서 채취할 수 있는 특유의 47개의 보타니칼(Botanicals)을 배합하여 증류한 술이라고 해서 몽키 47(Monkey 47)이다. 이 진은 그냥 소주잔에 담아 스트레이트로 마셔도 입안과 꼬 끝에서 꽃향과 향신료를 오랫동안 느낄 수 있다. 정교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잘 만든 진이다.

Bee's Knees

[레시피]

Bee's Knees

몽키 47 드라이 진 60ml

꿀 시럽 20ml (보통의 꿀 시럽 레시피는 꿀:따뜻한 물(섭씨 80-90도) 비율이 1:0.5인데, 나는 1:0.75로 배합해서 조금 더 묽게 만든다.)

레몬 시럽 20ml

로즈메리 줄기 1 (보편적으로는 레몬 껍질, 비터 오렌지(Bitter Orange) 등을 장식(garnish)으로 활용)

- 로즈메리를 제외한 모든 재료를 진, 꿀 시럽, 레몬 시럽 순서로 셰이커에 넣고, 얼음 4-5개를 넣고 흔든다. 냉장고에 보관한 칵테일 잔(Coup glass)에 따른다. 30초 정도 기다리면 잔 위에 흰색 링이 생긴다. 로즈메리를 넣어서 장식한다.


달콤했던 과거, 꿈과 상상력으로 하루를 보내고, 내일과 내년이 기다려졌던 웃음 가득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칵테일, Bee's Knees. 어린왕자의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이 연상되는 애잔한 칵테일이다.


참고문헌

1. Gin Foundry Website: https://www.ginfoundry.com

2. Monkey 47 Website: https://monkey47.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