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꿈, 그것을 이루지 못한 나의 위로주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장래희망은 언제나 '작가'였다. 글을 쓰는 직종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시인, 수필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이런 순서로 장래희망이란 것이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20년 가까이 꿈꿔온 글쟁이가 되지 못했고, 결국 사무실에 틀어박혀 세상 고리타분한 보고서나 쓰는 회사원이 되어버렸지만.
어려서부터 친구를 잘 사귈 수 없는 성격 탓에 말하기보다 쓰기를 더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말하기보다는 쓰는 게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했다. 머릿속에 떠 도는 낱말과 생각들을 받아 적기 하듯 써 내려가면 나를 만들어 나간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이란 여정에서 어느 정도 내가 누구인지 구체화되어가는 느낌, 정말 온몸과 정신이 일정 부분 해소되는 듯한 그 느낌 말이다. 그렇게 공책을 한 권, 두권 채우면서, 내 생각들이 담긴 종이라는 종이는 모조리 내 분신처럼 여기며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채워두곤 했다.
그렇게 공책 여러 권을 채우며, ‘마음 또는 생각 받아적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만족으로 여기며 성실히 글을 써가던 어느 날, 내 글을 좋아한다는 타인을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김없이 담임선생님은 ‘일기장 검사’를 하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고 주변 정리로 산만한 그 무리 속에서 턱을 괴고 앉아 바쁘게 일기장에 첨삭하던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권의 얇은 공책들이 숙제 검사라는 명목 하에 처리되고 있는 과정에서 내 공책이 선생님 손에 도착했고, 내 공책을 좀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내 이름을 호명했다.
평소에는 내게 1도 관심 없던 선생님이 ‘엄마’를 주제로 쓴 내 시가 너무 좋아 반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며, 나를 교단 앞으로 불렀다. 행여나 놀림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지만, 한 4연 정도 되는 짧은 시를 떨리는 손과 목소리로 수줍게 낭독했던 기억이 난다. 그 날은 내 인생 최초의 칭찬, 그리고 최초의 자작시 낭독의 날로 기록된다. 나의 어리숙한 낭독 후 아이들은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보며, ‘아주 아름다운 시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며 평가가 아닌 소감을 말했다. 안경 너머 지루해 보이던 그 선생님의 눈이 그날따라 더 깊어 보였고, 내게 가식이 아닌 진심을 말하는 듯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진심을 다해 써 내려간 내 서툰 글도 누군가에게는 잊혔던 감정을 어느 정도 되살릴 수 있는 계기 또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나는 시나리오 작가 또는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겠다며 8mm 카메라를 들쳐 메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촬영하고 편집하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창의적인 글쓰기를 하든 뭘 하든 아무튼 뭔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는 핑계로 공부는 뒷전이었고, 어쭙잖은 겉멋이 만만치 않게 들었던 때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오만했던 14-15살. 나는 내가 뭐라도 되는 마냥 뜻도 모르는 어려운 단어를 부적절하게 사용하며, 만연체의 문장과 구성조차 허술한 시나리오를 쓴답시고 설쳤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저렇게 밑도 끝도 없는 용기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글 스타일이 어떻든 나는 자카르타를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글쓰기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 특히 날을 기록하는 그 행위 자체로 매우 온전하고 성스러운 기록인 일기는 매일 썼다. 나는 그렇게 최대한 상세히 나의 감정을 끄집어 내 표현하는 것을 즐겼고, 중독되어있었다. 이 희한한 중독 속에서 나만의 철학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글쓰기를 단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자카르타에서 1년 365일이 내내 피곤해서 그런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이 곳에서는 복에 겨워 매일 택시를 타고 출근해서 그런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떠오른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교통지옥에서 드는 감정이라고는 갑갑함과 짜증뿐. 일기를 안 쓴지도 7년이 흘렀다.
교통지옥을 벗어나 회사라는 곳에 출근하면, 나를 기다리는 산더미 같은 전문들과 이메일. 나의 상사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쓰는 그 많은 보고서들은 유난히 촌스럽고 지루하다. 우선 폰트와 사이즈부터가 휴먼 견고딕, 가끔 굴림체. 그리고 글자크기는 보통 13. 나 따위가 상황을 분석해봤자 지역정세는 지구가 반대로 돌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 것은 매우 명백한데, 지역전문가 또는 정치학자라는 탈을 쓴 궤변론자들이 연신 밥벌이를 위해 쓰는 글들을 번역하고 분석하는 게 나의 주 업무이다. 나 역시 밥벌이를 위해 그런 일을 주로 하고 있는바(보고서 글투), 34살, 현재의 나는 하나마나한 보고서나 연신 써대는 머신(machine)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 날, 내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인스타그램 서핑을 하고 있던 그 찰나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노인과 바다'를 주제로 한 싱가포르의 The Old Man Singapore 바가 추천 포스트에 떴다. 헤밍웨이의 120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올린 사진 - 술병을 들고 호탕하게 웃는 헤밍웨이 - 과 캡션. 그 순간 작가가 꿈이었던 어린 날의 내가 문뜩 떠올랐다.
헤밍웨이는 엄청난 애주가, 아니 거의 알코올 중독자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말고도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로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 등 1900년대 초기 미국 문학을 주도했던 다수의 작가들은 엄청난 술고래들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헤밍웨이는 더 사보이 칵테일 북(The Savoy Cocktail Book, 해리 크래독 저 (1930년)), 스피크이지(Speakeasy, 제이슨 코스마스-뒤산 자리크 공저 (2010년)) 등 유명 칵테일 서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바텐더들의 뮤즈였다고 한다. 그 역시 바텐더들과의 상호작용과 칵테일로 영감을 얻어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술을 마시는 핑계 역시 단연 대문호답다.
“나는 타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신다.
(I drink to make other people more interesting)”
술과 사람을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굉장히 쾌활했을 것 같은데, 그는 실제 매우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작가이자 기자였던 그는 1930년대 쿠바에 살면서 방대한 집필활동을 하며 다수의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평론가들은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대자연의 엄숙함 등을 사실감 있게 묘사한 그의 작품들을 호평했고, 그는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외롭지만 혼자 있길 갈망했던 모순 속에 본인도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힘들어했으며, 4번의 결혼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 쉽게 싫증을 느꼈던 성격 탓에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고 한다.
말년, 그는 세금 체납과 쿠바에 놓고 온 집필 기록을 다시는 못 찾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거의 정신 분열 직전의 상태로 치닫았고, 그렇게 극도의 불안상태를 지속해오다가 아이다호에서 자기가 가장 아끼던 권총으로 자살하여 62세의 일기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헤밍웨이 작품 가운데 '노인과 바다'를 가장 좋아하는데,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 노인의 눈동자"와 같은 묘사들은 마치 광활한 바다와의 장렬한 싸움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 역사적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만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작품은 1951년 그가 쿠바에서 살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는 왜 쿠바를 좋아했을까.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열대지방의 뜨겁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의 마음을 압도했을까? 나는 아직 쿠바를 가보지 못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쿠바는 사회주의 체제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도 식지 않는 열정을 간직하며 깊은 눈동자 속에 슬픔을 지닌 국민들, 청량감 넘치는 파도소리와 나의 온몸을 스치는 섹시한 바람과 녹아버릴 듯한 뜨거운 햇살이 미물인 나를 압도할 것 같은 나라다.
다이키리(Daiquiri)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동쪽으로 약 22 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의 작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 무슨 사연이 있길래 헤밍웨이가 사랑한 칵테일, 다이키리가 만들어졌을까?
제국주의 서막을 알리는 스페인-미국 전쟁(1898. 4월-12월)이 발발하였을 때, 이 작은 마을이 미국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스페인-미국 전쟁이 한창일 때, 이 기지를 방문한 미국인 엔지니어 제닝 스톡튼 콕스(Jenning S Stockton Cox)라는 자가 철광산 인부들의 식량으로 나눠주는 바카디 럼(Bacardi Rum)을 보급하다가 설탕과 물 등 다양한 재료 조달이 가능해지자 재미로 만든 칵테일이 다이키리의 시초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훗날 미국으로 돌아온 콕스는 그의 칵테일 레시피 북에 6인분용 다이키리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지금과는 그 배합이 조금 다른데, 당시의 레시피는 "설탕, 바카디 럼(흰색 럼, Carta Rum) - 크게 럼은 다크 럼 와 흰색 럼으로 나뉘고, 흰색 럼이 조금 더 가볍다 - 물, 얼음을 넣고 섞는다."라고 되어있다.
대부분의 모던 클래식 - 1900년대 초반에 탄생한 - 칵테일들이 그러하듯 다이키리 역시 (역사적으로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칵테일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레시피가 일부 ‘수정’되었고, 현재 우리가 맛볼 수 있는 다이키리의 표준 비율 (럼주 1 : 라임주스 0.5 : 시럽 0.3)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금주령 기간 동안 다이키리의 인기가 시들했지만, 훗날 이 투박하지만 중독성 있는 칵테일이 유명해진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 헤밍웨이 덕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가 최애 하는 칵테일은 모두 공교롭게도 쿠바에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이 챕터의 주제인 다이키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히토에서 몰디브나 한잔 하고 싶다.’란 명대사(영화 내부자들)를 남긴 바로 모히토(Mojito)이다. 사실 둘 다 럼과 라임주스가 주 재료여서 비슷한 맛이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모히토는 탄산이 있다는 점.
그가 아바나에 살면서 자주 들리던 바(라 보데기따) 앞에 이런 문구를 적어놔 이 곳은 여행자들이 들르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내 모히또는 라 보데기따(La Bodeguita)바에,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El Floridita)바에”
나도 언젠가 쿠바를 방문하면 두 곳의 바를 꼭 들러 호탕함 속에 숨겨진 진짜 헤밍웨이의 고뇌와 심연을 상상하며 다이끼리와 모히또를 마셔보리.
럼주 (플랜테이션 3스타 (Plantation 3 Stars) 60ml
(Plantation 3 Stars) 원래 레시피에는 바카디 럼을 사용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다이끼리에는 이 럼이 제격인 것 같다. 럼의 질감이 훨씬 부드럽고 끝 맛이 달콤하다. 이 럼은 프랑스 산이다.
라임주스 25ml
시럽 20ml
쉐이커에 재료와 얼음을 넣고 30번 정도 흔든다. 칵테일 잔(coup glass)에 따른다.
다이키리, 나는 작가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그나마 남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다 네 덕인 것 같다.
참고문헌
Cocktails for you 웹사이트
https://www.cocktailsforyou.net/post/2019/04/01/the-history-of-the-daiquiri-cockt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