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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Aug 26. 2020

#3. 진 마티니 (Gin Martini)

음악 그리고 사색의 동지

귓속을 가득 메우는 아름다움, 음악.

소리의 즐거움, 음악. 나는 음악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어떤 이들은 일을 하거나 공부할 때 집중 향상을 목적으로 음악을 이용하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한다. 시각만큼 청각의 쾌락은 거부하기 힘든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최애 장비인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을 때면 마치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와 동맥이 서서히 음악으로 물들 것만 같은 느낌이다. 후렴구가 귓속을 가득 메울 때면, 지겹고 지루한 현실을 완전히 탈피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마음에 드는 곡을 찾으면 지겨울 때까지 '무한반복 플레이'를 한다. 


타의적인 출퇴근을 그나마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바로 이 음악의 위로 덕에 가능하다. 더럽고 갑갑한 택시 안에 착석하자마자 헤드폰을 꺼내 '무한반복 플레이 리스트'로 귓속을 채우면 정돈된 박자, 부서질 듯한 선율 그리고 거룩한 베이스가 내 귓속 통로를 지나 머리 위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때, 그때  몸 전체가 환기되는 것만 같은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얀 요한손

나는 가사가 없는 노래는 즐겨 듣지 않는 편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철학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음악이다. 가끔은 멜로디와 가사가 귀여운 벨기에 DJ '로스트 프리퀀시(Lost Frequency)'의 음악도 즐겨 듣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카르타의 교통지옥을 경험하고 있던 몇 년 전  그 날 아침, 스포티파이(Spotify) 앱을 열고 Made for You에서 내 귀에 착착 붙는 곡들을 염탐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묵직한 콘트라베이스와 가냘프지만 터프한 피아노 소리로 이루어진 곡이 나의 고막을 울렸다. 곡이 지속되는 4분 33분 초 동안 온 정신을 집중했다. 찰나의 미동도 참으면서 행여나 나의 허접한 숨소리로 소리를 놓칠까 조심하면서 말이다. 택시 창가 옆을 바퀴벌레처럼 붙던 오토바이도, 나에게 이것저것 묻는 성가신 기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신기하고 오묘한 곡은 내가 발음조차 할 수 없는 Visa från Utanmyra.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니 ‘개미가 보는 시선’이라는 스웨덴어였고, 나 같은 인간이 알리 없는 스웨덴 재즈계의 전설 '얀 요한손(Jan Johansson)'이라는 자의 곡이었다.

Jan Johansson 앨범 (1964년)

쾌쾌한 공기가 자욱한 습도의 도시 자카르타, 그리고 나의 평범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출근길. 그 길을 가고 있는 동안 내가 우연히 듣게 된 얀 요한손의 곡은 가사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마치 피아노의 선율이 내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것 같았다. 내가 익숙한 ‘정돈된’ 박자감도 아니고, 재즈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해괴하지만 극도로 세련된 곡은 거의 매일 아침 출근길에 듣는 약속같은 음악이 되었다. 


내가 우연히 요한손 음악을 접하게 되어 시공을 초월하며 교감하는 것처럼, 우연한 기회에 신비한 우정을 나누던 친구가 있다.



브뤼셀 Rue des Palais 28-30번지

나는 이미 벨기에 가기 전부터 멍청하게 보증금 사기를 당했다. 돈은 돈대로 잃고, 집도 없이 우선 브뤼셀로 갔다. 학교 근처 호스텔에서 보름 이상 지내면서 겨우 구한 집이 바로 '스카르빅(Scharbeek)'에 있는 'Rue des Palais 28-30'번지. 이 곳은 '궁전의 거리'라는 우아한 도로명과는 달리 우범지역이다. 그 것도 모른채 내 방 창가를 열면 한 눈에 들어오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마리아 대성당(Eglise Royale Sainte-Marie)이 마음에 들어 실용적 고민 1도 없이 집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지역은 2016년 브뤼셀 공항 테러 사건의 주범들의 집합소인 몰렌빅(Molenbeek) 옆 동네였다는 사실은 내가 벨기에를 떠날때 쯤 알게 되었다.

내 방 창가를 열면 보이는 마리아 대성당 그리고 별똥별

내가 고생 끝에 얻은 그 집에 이사하던 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내 키 만한 이민가방을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스스륵 열리면서 검은색 긴팔 상의를 입은 키 큰 남자가 등장했다. 눈이 부실듯한 금발머리가 마치 동화 속 왕자같았던 그 남자는 "Any help?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물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짐을 거뜬히 들어 내 방에 옮겼다. 알고 보니 그는 내 방 옆에 사는 룸메이트 마티유(Mathieu). 마티유는 벨기에 서부 코트렉트(Kortrijk)라는 소도시의 출신의 나보다 두 살 어린 청년이었고 플레미시(벨기에 북부지방, 네덜란드어권) 정당인 플레시미 자유민주당(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의 인턴으로 일하며 3개월 동안 브뤼셀에 거주할 계획이었다.


브뤼셀에 친구도 연고도 없던 나와 마티유는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3개월 동안 거의 매일 보는 절친이 되었고, 거의 매일 밤 내 방에서 어설픈 마티니를 제조해 마시며 음악, 영화, 인생, 철학, 정치 등 정말 다양한 주제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 술이 떨어질때쯤, 서로 좋아하는 음악 3-4곡을 무한반복으로 들으며 축축한 겨울밤들을 마무리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트램 안, 마티유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혹시 좀 있다 한 7시쯤 시간 돼?"

"왜?"

"그냥 오늘은 집에서 말고 밖에서 술 마시고 싶어서. 그랑 쁠라스 근처 큰길에 로드 바이런(Lord Byron)이란 바 있거든. 거기서 만나자."

"알았어."


알고 보니 그 바는 마티유 사촌누나가 바텐더로 일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마티니를 마실 수 있었다. 24살 남짓 대학원생과 22살의 인턴이었던 우리가 '멋진 어른'처럼 섹시하고 세련된 자세로 마티니를 즐기기엔 어딘가 허술했지만, 그때가 처음으로 내 자신이 좀 멋진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렇게 마티니로 저녁을 대신하고 새벽 3시쯤 터덜터덜 귀가했다. 


우리는 남녀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고, 말이 잘 통하는 오래된 친구 같은 사이였다. 매일 밤 좋아하는 음악을 서로에게 들려주고, 가사의 의미, 음악에 반영된 철학을 이야기했던 날들. 마티유가 했던 말 중에 내가 아직도 기억나는 몇 마디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나는 말을 낭비하지 않는 솔직함이 좋다.'라는 말이다. 심플하지만 강렬함을 좋아하던 그 친구가 자주 즐겨마시던 칵테일, 마티니와도 잘 어울리는 한 마디인것 같다. 


마티유가 3개월의 인턴을 마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내 방에 왔을 땐 마치 반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멀리 이사 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마티니 (Martini)

마티니는 그 어감만으로도 섹시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이 칵테일의 재료는 딱 두 가지, 바로 드라인 진(Dry Gin)과 드라이 베르무스(Dry Vermouth)이다.  베르무스는 일종의 강화된 발효주(fortified wine)인데, 시나몬, 카다몬, 레몬 껍질 등 10개 이상의 허브와 보타니칼(botanicals)이 들어있는 대용량 배럴에 와인을 넣고, 우리는 작업(infusion)을 통해 만든 술이다. 베르무스는 식전주로도 많이 마시며, 이탈리아의 마티니 앤 로시(Martini & Rossi)에서 제조된 드라이 & 스위트 베르무스가 제일 유명하다. 마티니 칵테일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마티니 회사의 창립자인 알레산드로 마티니(Alessandro Martini)여서 그의 성을 따 '마티니'라고 칵테일 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마티니의 탄생 배경이 어찌 되었듯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할 이 칵테일이 유명해진 것은 이안 플레밍의 소설, '제임스 본드-카지노 로얄'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06년 카지노 로얄(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에서 본드가 마티니 베리에이션(Martini variation, 베스퍼)을 주문하는 장면은 정말 멋있다.

Casino Royale (2006년작)
고든 진 3샷, 보드카 1샷, 키나 릴렛 1/2샷, 얼음처럼 차가워질때까지 흔든 다음,
얇은 레몬 껍질 넣도록. 알겠나?


드라이 마티니는 진과 드라이 베르무스 그리고 레몬 껍질이 들어가서,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이라면 헛 구역질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초콜릿 마티니, 에스프레소 마티니, 리치 마티니 등 단 시럽이 듬뿍 첨가된 마티니들도 많은데, 개인적으로 맛이 첨가된 마티니나 더티 마티니(올리브 통조림 물을 섞어 만든 짜고 신 칵테일)는 못 마시겠다. 

 

술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마티니이자 비교적 순수한 형태의 이 칵테일을 마실 때면 하루를 마무리하며 인생과 철학 등 여러 가지에 대해 밤새워 이야기했던 그 친구가 생각난다.  


진 마티니 (Gin Martini)

진 드라이 마티니

[레시피]

헨드릭스 진 60ml

마티니 비앙코 (Martini Bianco) 10ml

레몬 껍질

헨드릭스 진과 마티니 비앙코를 유리잔에 붓고 얼음을 넣은 후 바 스푼으로 30번 정도 저어 희석시킨다. 

거름망으로 얼음을 제외한 칵테일을 마티니 잔에 따른 후 레몬 미스트를 잔 위에 뿌린다. 

레몬 껍질은 칵테일에 띄우거나 담근다.


머그컵 마티니를 마셨던 우리가 벌써 30대라니! 마티유, 너는 잘 살고 있겠지. 이제는 이 누나가 제대로 된 마티니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1. https://www.drinks.ng/martini-cocktail-story-behind-d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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