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니아 Jan 06. 2025

'희랍어 시간'을 읽고

한강 '희랍어 시간'을 읽고 – 잊히지 않는 구절을 중심으로 (‘24.12.18)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이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의 접점은 희랍어 시간이다.


어릴 적 아홉 살 시절 K 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걷는 여자.

어릴 때 살았던 수유리에서 인수봉과 백운대라는 두 개의 흰 바위 봉우리를 올려다보면서 자랐다는 남자.  


어린애의 주먹보다 작은 박새 한 마리가 건물로 날아들어 작은 소란이 있던 날. 그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깨어진 안경에 손을 다치고 그녀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다녀와 그의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때, 처음으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일 년 동안 상복으로 입을 옷들을 꺼내 행어에 보관한다. 스웨터와 바지, 그리고 재킷, 검은 헝겊 가방과 목도리까지 상가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 같은 복장을 하고 수업에 간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 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 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으며 그 아이가 전남편의 집으로 들어간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이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오래 전의 밤

내가 너라면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 점자를 미리 배워 두겠어, 흰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도 익혀두겠어. 잘 훈련받은 리트리버를 사서 그 녀석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어.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그런 것이 너의 인생에 무슨 의미로 다가온 거냐고. 나는 되물을 것이다.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겠습니까?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