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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Jan 06. 2025

소설 '흰'의 목록들

한강 소설, '흰'의 목록들


에필로그. 맨 뒤쪽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싶었다. 주효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 그날 그날 학교에서 본 ‘흰’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던 아이. 흰 것은 단순한 하얀색이 아니다. 모든 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잠재태의 색채들이 현실화의 표면을 향해 우글거리며 올라오는 중이다.


강보 : 눈처럼 하얀 강보에 갓 태어난 아기

베내옷 :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베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달떡 :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

안개 : 지금 이 도시는 새벽안개에 담겨 있다.

흰 도시 : 돌로 된 잔해들의 흰 빛 위로, 검게 불에 탄 흔적이 눈 닿는 데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젖 : 여자가 몸을 일으켜 앉아 서툴게 젖을 짜본다. 처음엔.....그다음부터 하얀 젖이 흘러나온다.

초 :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성에 : 소설가 박태원은 첫 딸이 태어났을 때 그 창문을 보고 아기의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설영. 눈의 꽃.

눈 :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더는 그것을 지켜보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송이들 : 오래전 늦은 밤 그녀는 모르는 남자가 전신주 아래 모로 누워 있는 것을 봤다.

진눈깨비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흰 개 :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그 싱거운 답은 안개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 개의 이름은 안개가 되었다.

소금 :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라는 것이 글자 그대로 어떤 감각인지 그때 배웠다.

달 : 보름의 달을 볼 때마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보곤 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무엇이 두 마리 토끼이고 절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손수건 : 어떤 여자가 삼 층 베란다에서 빨래를 실수로 떨어뜨린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수천 개의 은빛 점 : ......멸치떼가 지나갔다야.

흰 돌 :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백야 :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넋 :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쌀과 밥 : 방금 지은 밥을 담은 그릇에서 흰 김이 오르고 그 앞에 기도하듯 앉을 때.

모든 흰 :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백발 :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멸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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