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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Jan 06. 2025

‘여수의 사랑’을 읽고

‘여수의 사랑’을 읽고 (‘25. 1. 1.)   

  

이정진 작가의 표지사진과 작가 한강의 글.

읽는 내내 우울하고 슬프고,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90년대 얘기.  더 막연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병들어가는 느낌이다. 자취방의 공유.  

   

오늘의 한강을 있게 한 어제의 한강을 읽는다. 1993년 만 스물세 살에서 약 1년 동안 쓴 단편 중 하나. 삶의 본질적 외로움과 고단함을 섬세하게 살피며 존재의 상실과 방황을 그려낸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여섯 편의 단편에 실린 ’ 여수의 사랑‘은 눈에 띄는 한편이다.   

  

고향 여수에 가족 간 트라우마가 있어 병을 앓고 있는 ’ 정선‘과  열차에서 강보에 싸인 채 발견되어 여수가 고향이라고 믿는 ’ 자흔‘의 이야기. 

    

중학교 때 김밥도시락과 함께 완행열차를 타고 거의 한나절 반이 걸려 수학여행을 갔던 곳. 여수항, 진남관, 오동도등의 기억과 함께 남은 인상은 우르르 몰려다녔던 아이들의 행렬과 낯선 항구도시의 밤 풍경들, 비릿한 갯내음과 함께 주인공의 우울은 수긍할 수가 없다.

     

여수는 ’ 정선‘에게 잊고 싶은 과거가 있는 곳이다. 그걸 숨기고 지난한 서울살이를 하던 중 후배의 군입대로 남겨진 전세방에 생활비를 분담할 동거인을 찾게 되고 ’ 자흔‘이 함께 지내게 된다. ’ 자흔‘또한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로 고향이 어딘지 모른 채 여수발 서울행 통일호 열차에서 발견됐다는 것만으로 막연히 여수가 고향이라고 믿고 지낸다. 그녀는 여수행 밤기차표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 정선‘은 심한 결벽증과 히스테릭한 성격으로 도무지 주변정리가 되지 않고 백치미가 흐르는 ’ 자흔‘이 마침내 자취방을 떠나게 되고 그 후 심한 공허감에 시달리던 ’ 정선‘은 ’ 자흔‘을 찾아 여수로 떠난다. 

     

<내일 오전 열 시 삼십오 분발 통일호... 여수까지.> 

열차표를 받아 든 뒤 역 광장 가장자리 공중전화박스에서, 선배의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후배는 출장 중이라 했다. 모두가 통화 중이었고,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모두가 바빴다. 

수많은 역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지친 얼굴로 땅거미가 내리는 황량한 역 광장을 종종걸음 친다.  

   

종착역 여수를 향해 내달리는 기차 안. 정선은 내내 자흔을 추억한다. 동반자살을 시도하고 동생을 죽게 한 아버지를 추억한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순천을 지나고, 여천을 지나고, 마침내 내린 여수에서 정선이 만나게 되는 여수는 어떤 모습일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자흔은.


도착한 여수역 차창밖에는 승객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한 바람과 함께 세찬 비가 흩날리고 있다. 

    

습기 먹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차장의 목소리는 남도의 곰살궂은 억양을 타고 한산한 객실 의자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그 귀에 익은 억양은 그 순간 가장 먼저 나에게 실감으로 다가온 여수의 인상이었다.

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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