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S신고 러닝머신은 곤란한데...

그래도 헬스장의 빌런은 되지 말자!

by 임지원


아파트 커뮤니티 헬스장의 특성상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다니다 보면 익숙한 얼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왠지 서로 친숙하게 인사를 나누지 않는 분위기다. 놀이터에서 만났다면 벌써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었음직한 중년의 그녀들이지만 헬스장에서는 왠지 서먹서먹하다. '대화는 휴게실에서 하라'는 문구가 벽에 붙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왠지 누가 내 입을 막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내가 발견한 중년여성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내가 이걸 말하면 내 또래 여성들은 대부분 웃음이 빵 터진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만 했는데, 그냥 그 말을 이미 해버린 상태가 돼버리는 것. 생각만 했는데, 왜 벌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여러 번의 실수를 거듭하며 나도 모르게 입을 꾹(아주 꾹) 다물게 된다. 갑자기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특히 학부모 상담 가서 이 증상 나타나면 진짜 큰일 난다.




헬스장에 들어서면 여러 대의 러닝머신이 날 맞이한다. 나는 가장 마음에 드는 한 대를 선택한다. 햇빛이 뜨거운 날엔 벽 앞에 있는 것으로 적당히 밝은 날엔 창 앞에 있는 러닝머신에 올라간다. 그리고 발목을 돌린다. 계속 돌린다. 끊임없이 돌린다. 무릎도 돌린다. 계속 돌린다. 너무 많이 돌렸나 싶을 만큼 돌린다. 이건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이래야 계속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있다. 중년의 무릎은 무쇠가 아니다.

다음은 스포티파이 내 라이브러리에서 [운동]을 선택한다. 지난 10개월 동안 나를 걷고 달리게 해 준 고마운 음악 플레이리스트다. (차차 공개할게요) 리듬에 맞춰 5.8의 속도로 신나게, 힘차게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데 마침 바로 옆 러닝머신 위로 나잇대가 짐작이 안 되는 한 여자분이 자리를 잡았다. 곁눈으로 살짝 보니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신는 운동화 브랜드, 반스다. 20대인가? 30대인가? 아무리 젊어도 반스를 신고 러닝머신을? 게다가 단 1초의 발목 준비 운동도 없이 바로 속도를 올리며 양팔을 위아래로 뻗으며 그녀는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귓속 에어팟을 통해 들리는 음악은 며칠 전 둘째랑 본 '스즈메의 문단속'영화에서

나왔던 아라이 유미의 '루즈의 전언(ルージュ の伝言)'.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사랑스럽고 희망찬 곡이라 슬슬 속도를 올리고 싶어졌다. 오늘은 얼마큼 뛸 수 있을까? 기대감도 생겼다. 8.7 내가 뛸 수 있는 최적의 속도까지 올리고 뛰기 시작했다. 몸도 가볍고, 기분도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이윽고 바로 옆 그 여자분도 속도를 올리더니 나와 비슷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쾅쾅쾅! 달리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에어팟까지 뚫고 내 귀로 들어왔다. 반스 신발의 특성상 바닥이 딱딱한 편이라 저런 소리가 나는 모양이다.

아까 러닝머신 올라올 때 발목을 안 돌렸으니 그것도 걱정이고 딱딱한 반스 신발에 무릎도 걱정이고... 나도 모르게 입을 앙, 꾹 다물었다. 적어도 헬스장의 잔소리 쟁이 아줌마는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이 생각은 절대 말이 되면 안 된다. 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그녀다. 그녀의 무릎은 강철이고, 발바닥은 무쇠다!


반스를 신은 젊은 그녀와 함께 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훨씬 많이 달렸다. 갑자기 경쟁심이 차올라 그녀보다 더 잘 달리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달렸다. 역시 젊음은 당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더 오래 달렸다. 내가 이긴 느낌이다. 숨이 막 차오르고 얼굴엔 땀이 흐른다. 내 몸이 뜨끈뜨끈한 호빵이 된 듯 김이 난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컴컴한 내 얼굴이 핑크가 되다니...

그래, 이래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거다. 내일도 만나고 싶다, 반스를 신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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