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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Nov 22. 2023

말하지 못할 정도의 나쁜 생각이란?

11. 4월 11일 : 인성검사

4월 11일 


 오늘 학교에서 인성종합검사를 했다. 

백록담 선생님은 이걸 MBTI검사랑 비슷한 거라고 하셨는데 해보니 그런 거 같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마음에 안 든다.’와 같은 질문에 예, 아니요 표시를 하는 거다. 

아빠가 살인청부업자는 아니니 마음에 안들 이유는 없다. 아니요에 표시했다. 

질문 중에 우리 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문항이 있었는데, 바로 


‘나는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있다’이다.  


동한이와 까불이들이 백록담 선생님에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생각이 뭐냐고 질문을 

했다. 그리고 아주 시끄럽게 떠들었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으시는 선생님이지만 오늘은 까불이 패거리를 확실하게 

제압하셨다. 그렇다고 교실 밖으로 내보내거나, 뒤에 서 있게 하신 건 아니다. 

평소보다 확실하게 큰 목소리로 “장난 그만!”이라고 외치셨는데,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나도 가끔은 나쁜 생각을 한다. 

지구가 멸망하는 생각 같은 건 아니고, 수아 얼굴과 등에 여드름이 많이 나는 생각, 

나만 빼고 우리 반 친구들 모두 생리를 하는 생각, 

남자 애들도 가슴 나오는 생각. 

흠... 여기까지만 쓰자. 

말할 수 없는 나쁜 생각이잖아! 그렇다면 쓸 수도 없는 거지!    


 오늘 수아가 수학 익힘책을 안 가져왔다. 

그래서 우리 '괜찮아 모둠'은 칭찬 스티커를 못 받았다.  

지금까지 받은 스티커는 12개뿐인데, 16개를 붙여야 쿠폰을 뽑을 수 있다. 

다른 모둠은 이미 16개 스티커를 다 붙이고 '신청곡 틀기'쿠폰을 챙겼다. 

수아가 원망스럽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납득이 안 된다. 

수아란 아이가 수학 익힘책을 안 가져오는 건, 

내가 수학 시험을 백점 맞는 것만큼이나 일어나기 어려운 일 아닌가?     

적어도 수아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문득 수아의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생각은 뭘까? 궁금했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다. 우린 이제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오늘 엄마 아빠가 싸웠다.  

아빠가 엄마에게 “내가 돈 벌어오는 기계야!”라고 했고,  

엄마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되려면 한 달에 1억은 벌어와야지!”라고 대답했다.  

엄마 목소리가 더 컸다. 내 눈엔 엄마가 아빠보다 강대국처럼 보였다.  

아빠가 나가버리자 엄마가 엉엉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경단녀야. 이제 늙어서 돈도 못 벌어. 예전에는 대단한 회장님 자서전도 쓰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회식날 노래방에서 엄마가 핑클 노래를 부르면

 다 같이 핑클맘! 핑클맘! 해줬는데, 

 이젠 소리나 꽥꽥 지르는 갱년기 아줌마야... 엉엉"


 엄마의 저 말을 백만 번쯤 들은 거 같다. 

그래도 저 말을 하는 엄마가 엄청 슬플 거라는 건 안다. 

그리고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엄마 고마워. 엄마 사랑해. 엄마가 최고야!”    


엄마의 눈물을 보니, 나도 왠지 슬퍼진다. 

폐기능 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중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엄마는 ‘워킹맘’이었다. 

엄마는 할 일이 많아 퇴근을 할 수 없었고, 언니는 유치원 종일반에서 매일 엄마를 기다렸다. 

유치원 종일반에는 언니처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딩동’ 벨이 울리면 모든 아이들이 동시에 현관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현관 앞에 선 엄마는 단 한 명. 그러니까 엄마의 품에 안겨 유치원을 나가는 아이도 

한 명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나머지 아이들은 다음 딩동 소리를 기다리며 지루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평소보다 늦게 퇴근한 엄마가 이미 해가 진 컴컴한 운동장을 달려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딩동’ 벨을 눌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일곱 살 언니가 나왔는데...   


“언니가 울지도 않고 엄마를 보고 웃는 거야. 근데 눈은 벌써 몇 번을 운 거 같아,

 촉촉한데 말라있더라.” 


언니를 등에 업고 집으로 오면서 엄마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때도 엄마는 눈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엄마는 많이 울었다. 

그리고 오늘도 엄마는 아빠랑 싸우고 운다. 

워킹맘도 되고 싶고, 핑클맘도 되고 싶어서 운다. 


“엄마 아빠, 싸우지 마세요. 그리고 제 걱정도 그만하세요. 전 이제 제법 건강하고

 그럭저럭 괜찮아요. 게다가 전 이미 소설을 쓸 만큼 대단한 열두 살이라고요! 

 근데, 진짜 엄마의 별명이 ‘핑클맘’이었나요? 왠지 부끄러워져요.”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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