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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Nov 14. 2021

제주의 단풍과 은행은
별로일 줄 알았지

보다보니 별로 좋더라고

나는 원래 단풍놀이를 즐기진 않았다.

그러다 대학 졸업 학기에 후배들 데리고 몇 번 가을 소풍하러 갔던 적이 있는데, 그 풍경이 참 강렬했다. 내장산에 단풍놀이를, 선운사에 꽃무릇 구경을 하러 갔는데, 채도가 참 높아서 뇌리에 박혔다. 특히 꽃무릇은 잔인할 정도로, 피가 범벅인 것처럼 빨갰다.

풍경보다 즐거웠던 건, 사실 함께 갔던 친구들이다. 나도 그렇고, 그 친구들도 '똘끼'가 넘쳤기 때문에, 겨울이 다가오는 시냇물에 머리도 감으면서 미친 듯이 놀았다.


그 당시에 찍은 꽃무릇. (과장 보태서) 빨개서 눈이 아플 정도.


산이 노릇노릇해질 무렵이면, 그때 추억이 은은히 펼쳐진다.




제주는 단풍이 별로 없다. 가까운 오름을 쳐다봐도 시퍼런 상록수가 많고, 도로변엔 봄의 전성기를 회상하는 벚나무만 누렇게 펼쳐져 있다.

'이번 가을은 기억 여행이 다일까', 단념하려는 순간! 천아숲길 단풍이 예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음사도 예쁘지만, 관음사를 가는 건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이다. 그럴 의지까진 없었기에, 천아숲길을 목표로 인스타그램 최신 사진을 검색했다. 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약속 없는 주말. 오전에 산뜻하게 천아숲길로... 가려는 계획은 예상치 못한 승부욕이 연기시켰다.

'간만에 게임 한 판만 해야지!' 다들 알다시피, 한 판은 이기는 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지독하게 이기지 못한 채 몇 시간이 흘렀다. 비 온다던 하늘은 쾌청하게 맑은데, 내 머릿속은 패배의 천둥번개가 가득했다.


그렇게 오후 늦게 달려갔던 천아숲길. 한 시간 정도 걸으면 해가 떨어질 시간이었다. 단풍을 즐기고 밀려 나오는 차에 왕복 1차선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멀리 차를 세우고 빠른 걸음으로 천아계곡으로 향했다.


물은 없고 돌로 가득한 천아계곡 양옆으로 불그스름한 단풍이 나란히 줄을 섰다.

천아계곡의 단풍. 돌탑이 많이 쌓여 있었다.


처음엔 조금 실망했다. 인스타그램 속 사진은 높은 채도로 범벅인 사진들이었구나. 이게 그렇게 빨간색이 될 수 있나?

예상과 다른 풍경에 한숨 한 번 쉬면서, 숲길을 조금 걸었다. 거의 모두가 계곡에서 사진만 찍다 가기 때문에, 숲길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와글대는 소리를 멀리 밀어내며 20분 정도 걸었다.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바람 소리에 춤추는 잎사귀만 느껴질 무렵, 나는 발길을 돌렸다.


조릿대의 푸르름에 익숙해진 탓일까? 다시 본 단풍이 강렬해 보였다. 새파란 숲에 낙엽의 알록달록함이 새삼 어색하고 화려했다. (단순히 원추세포가 피로해서 색의 잔상 때문은 아닐 것 같다) 무심코 넘어갔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 본다.


이번 가을, 단풍은 이걸로 만족한다.




이번엔 은행나무가 예쁜 곳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육지에 있을 때, 반계리 은행나무 사진을 보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다. 시야에 모조리 담을 수 없을 만큼 샛노란 은행잎의 위엄을 느껴보고 싶었다.

물론 제주의 은행나무는 그렇지 않겠지만, 단풍과는 또 다른 산뜻함의 은행나무를 보고 싶어, 제주대학교로 훌쩍 떠났다.


제주대 교직원 아파트로 이어지는 작은 오르막길 양옆으로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섰다. 아직 푸른빛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푸른색을 지니고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추워져서 옷 갈아입을 틈이 없었나? 온통 노란색은 아니라서 또 조금 아쉬웠지만, 며칠간 내린 비가 물러가고 파란 하늘이 보여서 일단 신났다.


제주대학교 은행나무길. 초록이 섞여 오히려 하늘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마침 내가 사진을 다 찍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내가 참 좋은 타이밍에 왔구나. 옆에 있는 권제오름을 걸으며 은행나무와 작별인사했다.




한라산엔 이미 눈이 쌓였다. 단풍과 은행, 그리고 설산을 동시에 보여주는 제주의 매력.


내년, 이 무렵에 다시 만날 붉은빛과 노란빛이 분명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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