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곶자왈 반딧불이
지금, 꿈 같지 않아요?
이젠 정말 한순간의 꿈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날.
개똥벌레와 반딧불이의 차이를 아는가? 놀랍게도 같은 단어다.
같은 벌레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만, 왜 반딧불이가 개똥벌레인지 유래를 아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하나를 소개해 보련다.
우리 엄마아빠 세대는 어렸을 적 반딧불이를 참 많이 봤다. 그래서 시골의 개똥처럼 많다고 개똥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개똥에 꽂힌 한 지인은, 나더러 "쇠똥구리 본 적 있어요?" 하며 묻기도 했다.)
세상이 변했다. 요새는 애완견의 개똥도 다 치우는 시대다. 개똥과 운명을 같이하는 개똥벌레. 개똥을 보기 힘들어지니 개똥벌레도 점차 보기 힘들어졌다. 이제 내 세대는 야생 반딧불이를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봤다. 난 강원도 사람이니까.
초등학교 때, 우리 가족 주말농장이 깡시골에 있었다. 어느 날 밤, 풀숲의 작은 반짝임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20년 전은 너무 오래됐으니, 조금 최근으로 시간을 옮겨보자. 3~4년 전에도 반딧불이를 본 적 있다. 바로 군대에서.
경기도 포천 어딘가로 훈련 갔을 때, 훈련장 인근 산에 등산로를 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가 졌는데 산꼭대기에 있는 작전지역으로 가란다. 짐 바리바리 싸 들고 한 시간 넘게 올라가는데, 거의 도착하니 군복은 땀으로 범벅이다. 등산로에 샤워할 곳은 없는데... 후...
마지막 오르막 코스를 앞에 두고 잠깐 쉬고 있는데, 저기서 흐린 불 하나가 반짝. 눈이 뻑뻑해서 잘못 본 줄 알았다. 안경 닦고 다시 보니 반-짝. 두어 마리 반딧불이가 보였다. 분명 힘들었던 추억이지만, 반딧불이 덕에 반-짝하고 추억 속에 남아있다.
같이 쓰레기를 주웠던 어떤 분이 인스타그램에 반딧불이 보러 간다는 스토리를 올렸다. 오?! 제주에 반딧불이가 많나?
당장 검색해보니, 제주 서남쪽 곶자왈에 반딧불이 코스가 따로 있었다. 7월 초까지만 예약제로 운영하고, 게다가 이미 거의 매진이었다. 입장료도 있길래 '반딧불이를 만 원이나 주고 봐야 하나?' 의구심이 들었다. 여느 다른 관광지처럼, 도민할인 가격 아니면 돈이 아까운 그런 곳이 아닐까 의심했다.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스크롤을 내려 후기를 둘러봤다.
너무 신비로운 경험이였어요. - wXXXXXX
어림잡아 수천 마리의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만난 거 같아요. -한XXX
칭찬 일색이다. 황홀하다, 또 오고 싶다, 아주 난리가 났다. '서울 사람들이라서 반딧불이 신기하겠지~' 했는데, 어? 수천 마리... 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 반신반의하면서 '이런 건 직접 팩트체크할 필요가 있다.' 싶었다.
가고 싶어졌다.
가볼 거다.
가봐야지.
회사에 이미 가보신 분이 있어서 어땠냐고 여쭤봤다. 그랬더니 "썸녀(마음에 드는 여성분)랑 같이 가세요~"하신다. 안타깝게도 같이 보러 갈 "그런 사람"은 없지만, 왜일지 자못 궁금해졌다.
더 가고 싶어졌다.
드디어 당일, 혼자 씩씩하게 반딧불이를 보러 갈 뻔한 나와 함께 가준다는 (아주 자비로운) 두 분과 함께 청수곶자왈로 향했다. 인터넷 예약은 매진인데, 남은 여유분의 표를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고 해서 일찍 오후 5시에 도착했다. 8시 30분 입장권을 손에 쥐고 고산의 아름다운 노을을 즐기고 오니 딱 맞았다.
여담인데, 차귀도 뒤로 지는 노을은 너무 아름답다. 고산 너무 예뻐.
버스를 타고 숲길의 시작점으로 이동했는데, 내리니까 아무것도 안 보인다. 가로등이고 뭐고 하나도 없으니 그냥 시꺼멨다. 맨 앞과 뒤에 계시는 안내사분의 희미한 야광봉에 의지하여 걸었다. 밤하늘은 구름도 짙어서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 <어바웃타임>에 나오는 암흑카페에 간다면 이 느낌일까? 자박자박, 발걸음을 따라 걷는다. 옆 사람과 떨어지지 않게 소심한 손가락 하나를 걸고 걸었다.
왜 썸녀랑 오라는지 알겠다. 어두워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다음에는 꼬...ㄱ...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아니, 중요한 건 맞는데 일단 그건 다음에.
뭐야... 반딧불이 어딨어?
잔뜩 기대한만큼, 마음 급히 배신감을 느끼던 차에, 뾰로롱~ 뭐가 지나갔다.
어둠에 서서히 적응하니, 마냥 검던 숲에 흐릿한 명암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위로 불빛들이 흩날린다.
아, 수천 마리는 거짓말이다.
수만 마리가 맞는 말이다. 80분 동안 봤던 반딧불이 다 합치면 족히 수만 마리는 된다.
웬만하면 사진을 첨부해서 그 아름다움을 편하게 설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었다. 카메라를 켜면 불빛과 소리 때문에 반딧불이한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찍어도 잘 안 나온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증할만한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하... 이걸 말로만 형용해야 한다니, 자신이 없다.
내가 80분 동안 걸으면서 내 표현력을 영혼까지 끌어모았던 대사로 사진을 갈음해보련다.
우와... 너무 예쁘다
깜깜한 밤하늘을 날아서 별을 내려보는 것 같아 (정확히는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우주를 유영해야 한다)
스파클라(막대형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이고 반딧불이의 빛만 보이니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이에요. (눈을 감아도 보일 것 같아)
여기 그냥 가만히 누워 빛을 감상한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나를 따라오는 반딧불이를 보며) 게임 속 펫(애완동물) 같은데요 ㅎㅎㅎ
(안내사분께) 이렇게 예쁜 광경을 매일 보시는 거예요?
하늘을 보면 별이 보이고 숲을 보면 반딧불이가 보여
구름에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서 별과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숨기를 반복했다.
초승달의 틈새로 겨우 비치는 달그림자도 이렇게 밝을 수 있구나. 북두칠성도 유난히 선명하여 평소보다 더 예뻐 보인다.
그리고 하늘의 천체를 질투하듯, 더욱 밝고 더욱 반짝이는 반딧불이의 장기자랑. 이렇게 뽐내는데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80분의 산책이 짧지는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다.
망막을 자극하는 광자(photon)를, 어느 하나도 잃거나 잊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코스를 지나 웃뜨르빛센터에 도착했을 때, 가로등에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다. 왜 인간이 생태계를 교란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분명 반딧불이와 별은 밝았지만, 인간의 빛은 그보다 수백 배 밝았으니까.
처음 반딧불이를 본 사람은 놀라겠지만, 처음 사람의 빛을 본 반딧불이는 환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에 본연의 빛을 잃겠지...? 그래서 도시엔 반딧불이가 없는 게 아닐까?
내년에 또 반딧불이를 보러 올 것이다.
하지만 웃뜨르빛센터는 아닐 것 같다.
서귀포 대정에 사는 지인은 반딧불이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가, 산책하러 가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년엔 자연의 반딧불이를 찾아, 그곳에 멈춰 가만히 빛을 즐기고 싶다.
내년에도 반딧불이가 여전히 빛나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