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과에 가는 날이었다. 병원에 방문하면 혈압을 측정할 텐데 한참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나는 혈압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게 높은 편은 또 아닌데, 혈압을 측정하고자 하면 혈압이 더 오른다. 오늘은 과장된 내 혈압을 보이고 싶지 않다. 혹시 마음을 차분하게 유지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일부러 병원까지 계단도 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처럼 하면 된다고, 차분하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지만 긴장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더니 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결국 혈압은 높게 나왔다. 의사의 흰 가운만 보면 혈압이 오른다고 화이트 코트 신드롬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아마 나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
비슷한 사례, 이전에 클래식 기타를 배운 적이 있다. 나무 악기에서 나는 소리와 분위기를 좋아했다. 능숙한 연주가를 보면 손가락이 마치 부지런한 거미의 다리처럼 움직였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하게 되었다. 나는 초급자라 왼손가락을 거미처럼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평소 사용하지 않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왼손이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꼭 어디론가 점프를 하는 듯 느껴졌다. 부담감 때문에 마음도 편치 않았고 음악도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나는 지금 연주하고 있는 음표의 길이를 충분히 연주하지 못하는데 아마도, 다음 왼손의 자리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이 원인인 것 같다고 했다. 다음 왼손의 자리를 실수하는 일은 적었는데, 지금의 음표를 충분히 연주하지 못한 탓에 음악이 편안하게 들리지 않고 꼭 어딘가에 쫓기는 듯 들렸다. 사정이 있어 기타를 그만둔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자꾸 마음에 남는다. 혹사 자꾸만 다음을 걱정하느라 지금을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당신의 가장 첫 기억은 무엇인지, 정신분석 혹은 정신치료를 하는 때에 묻는다. 어린 시절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질문인데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정신치료 시간에는 과거의 기억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수많은 사건 중 어떤 것이 마음에 선명하게 남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어떻게 성격이 형성되었는지 짐작한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퍼즐 조각 같다. 그렇지만 너무 과거의 일에만 중점을 두다 보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한탄하며 후회에 머물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그 과거의 일이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정신과에서는 지금 여기를 중시한다. 과거의 사건이 성격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서,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나타나는지, 특히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관계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중요하게 본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마음 챙김에서 하는 건포도 명상이 있다. 건포도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건포도 한알을 바라보고, 온 감각에 집중하며 10분 동안 건포도 한 알을 먹어보는 방법이다. 건포도 명상을 실제로 시도해보면 지나가는 수많은 감각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판에 손가락이 닿는 감각, 나를 둘러싼 공기의 온도, 선풍기 바람의 간지러움, 살짝 건조한 듯 매콤한 냄새, 모니터를 구성하는 색, 멀리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등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각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미래나 혈압이나, 다음 손가락 자리를 신경 쓰느라 나는 그런 많은 것들이 지나간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지냈던 것 같다. 혹시 지금에 집중한다면 나의 혈압도 안정적으로 측정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혼자 글을 쓰는 사람을 찍는다고 하면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고심하는 평온한 표정, 문득 뭐가 떠올라 작성하는 사람을 보여줄 텐데, 현실의 나는 음악을 듣다 문득 sns를 확인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음악을 바꾸고 다시 조금 쓰다 괜히 책을 펼쳐봤다. 마음 챙김의 개념은 불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실천다보면 마음이 비워지고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만 마치 수양 같은 것이어서 한번 시도한다고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이 꼭 새로운 시선처럼 생각되기도 하다. 마음 챙김을 실천하다 보면 비울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자꾸 채우려고 해왔던 것 같다. 불안을 줄이기 위한 행동들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 때엔 내 마음을 정리가 되지 않은 방처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