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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Jun 23. 2023

정신과 의사도 정신이 괴롭다

나는 어떤 글을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혹시나 정신과 의사도 정신이 괴롭다는 제목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의외성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이 건강하다는 전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 정신과 의사에 대해 인격적으로 성숙한 면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의 고민이 있다. 또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가족 내에서의 압력을 견디며 지내고 있다. 직장인으로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어려서의 일들이. 아니면 성장해서 내게 벌어진 일들이 문득 신경 쓰이는 날들이 있다.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는 과거의 일도 있다. 수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의 꿈을 종종 꾼다. 어느 날에는 하염없이 퇴근을 바라거나,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잠이나 자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때때로 마음이 괴롭다.


비교적 평온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의 괴로움이나 감정에 대해 표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니고 살아왔다. 어려서는 내게 차라리 큰 어떤 사건이 내게 있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화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흐름이라도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보다는 혼자 마음속으로 품는 편이 편안했다. 진료 장면에서 듣는 수많은 트라우마들에 비하자면, 나는 그다지 굴곡 있는 삶을 산 것은 아니다. 누가 나더러, 너는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아놓고 왜 그렇게 힘들다고 찡얼대는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다소 억울하다. 고통의 크기를 잴 수가 있을까. 나의 트라우마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해서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행복한 듯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괴로움이 있다.


레지던트 1년 차 3월, 교육의 일환으로 종합심리검사를 받아본 적이 있다. 보통 병원에서 시행하는 종합심리검사가 어떤 것인지, 어떤 구성으로 되어있는지. 검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평가를 받는 환자의 마음은 어떨지 경험해 보라는 취지였다. 신경심리검사까지 세 시간 정도 진행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새로 들어온 1년 차 임상 심리 수련생 선생님이 배울 수 있도록 이제 막 수련을 마친 선생님이 옆에서 검사를 지켜봐 주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의국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데 내 검사를 지켜봐 준 전문가 선생님이 의국에 들렸다가 내가 한 검사 결과의 의미를 대략적으로 해석해서 들려주었다. 투사 검사 중 하나인 로샤 결과 해석을 들으며 크게 놀랐다. 나는 그저 눈에 보이는 무의미한 잉크 자국을 내게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구조적 결과 해석을 통해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엔 어쩌다 잘못 나온 것이겠지 하고 흘려듣고자 했는데, 나중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일관된 결과를 보고는 검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왔던 시기였다. 개인적인 감정은 숨기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일종의 사회화고, 성숙한 직장인으로서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다니. 어느 때엔 숨기려 하고, 어느 때엔 나를 속이고자 해도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짧은 시간 동안 나에 대한 검사 결과를 들으면서는 왠지 짠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만 같기도 했었다. 단순히 괜찮다 혹은 힘들었겠다 말을 듣는 것보다 정확하게 이해받는 것이 중요하단 것을 알았다.


진료 장면에서 많은 분들이 할 이야기가 없다고들 하신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과거와 달리 상대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라 걱정이 없다고도 한다. 털어놓지 않으면 되는데, 털어놓기 때문에 없던 병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때엔 어떤 마음의 둑이 터질까 봐 걱정하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매우 힘들고 자살 사고에서도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자신이 우울증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 병원을 찾는 분도 많다. 내가 느끼는 마음의 주관적인 고통이 과장되어 있을까 봐, 의사의 소견이라도 들으면 좀 나을까 싶어 확인받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힘든 시기에만 힘든 마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오이디팔 컴플랙스를 생각해 보면, 그저 태어나서 아버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주요한 갈등이 생긴다던데. 누구나 나름대로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것 모두가 그 앞에서 최선을 다해 괴로워하고 저항하고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지. 정말 자신의 문제를 부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어떤 원죄가 있다거나, 인생은 번민의 연속이라는 말의 의미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다. 나는 내 마음이 괴로운 것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나의 마음의 괴로움을, 소소한 어려움을 더 열심히 풀어놓아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어떤 선생님은 어떻게 힘든 인생을 잘 헤쳐나가는지, 어떤 인간관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내게 득이 되는 관계는 무엇이고, 내가 독이 되는 관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코칭을 해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기개발서보다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그것이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사진을 오랫동안 찍어왔다. 처음에는 구도, 색감 등에 신경을 쓰느라 빛을 담는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을 찍다 보면 그 대상이 예쁘다기보다 빛이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는데, 나중에 어떻게 빛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되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도 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시선으로 궁금해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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