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소설
『한낮의 시선』
이승우, 자음과 모음, 2021
이승우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불안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자기를 발견해 나가고 자기 존재를 형성해 나간다. 그들의 불안의 시작은 대부분 아버지의 부재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종국에 그들이 마주하고 극복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불안 자체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삶의 본래적인 존재 양태가 바로 불안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즉, 불안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비로소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던 것이 진실로 자기 존재의 결핍이 아니며 자기에게 충족되어 있던 것이 진실로 평안한 일상의 조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지면서, 또 두려워 도망하였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를, 소망하게 되면서, 자기를 발견해 나간다.
『한낮의 시선』(이승우, 자음과 모음, 2021)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 라는 『말테의 수기』(릴케)의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이 소설 속 한명재는 말테의 기분을 빌려와 자신의 기분을 고백한다. “군인들이 지어 보이는 침울하고 완고한 표정은 그들과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나에게 모종의 불안을 일으켰다. 불러일으키다니! 나는 무의식중에 불러낸 하나의 단어에 움찔했다. ‘불러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불러내진 것들은 불러내질 때까지 누군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것이다. 심지어 불안은 누군가 불러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한낮의 시선, 11~12쪽)
위와 같은 이 소설의 첫 부분을 보면, 명재는 자기가 잉태한 불안, 혹은 불안이 잉태한 자기를 막연히 느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불안이 깨어날 수 있는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미 예감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위에서 명재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이 ‘모종의 불안을 일으켰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고백하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인상적인 순간으로 경험되기는 하지만 이내 사라져 버린다. 불안과 그 감정에 따르는 섬뜩함이라는 감정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이 기억하는 평안한 감정을 소환해 재빨리 그 감정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안이라는 감정은 사라지질 않으며 오히려 자기를 마주하고 인정하라고 하는 것만 같다. 명재는 요양을 위해 혼자 머무르고 있는 어머니 별장에서 불안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내 마음속에 무언지 모를 불안의 입자가 떠다니면서 내부의 안락감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산책길에서였다. 설마 하며 뒷걸음치는 정신을 내몰 듯, 이래도 깨닫지 못하겠냐는 듯, 석연치 않은 일들이 갑자기 자꾸 일어났다. 그날, 옷을 입지 않은 채 숲길을 걸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키 큰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붉은 석양빛을 받으며 남자는 휘적휘적 걸었다.”(한낮의 시선, 35~36쪽)
소설의 첫 부분에서 한명재가 느낀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예감은 위와 같은 낯선 환영으로 현현된다. 한명재는 고독 속에서 불안감을 절절히 느끼기 위해 요양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애인의 사랑과 보호로부터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요양을 시작한 것이지만 위와 같이 낯선 환영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섬뜩함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규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빠져 있으면서 공공성의 편안함 속으로 도피하는 것은 ‘편치 않음’ 앞에서의 도피, 다시 말해서 내던져진, 그의 존재에서 그 자신에게 내맡겨진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놓여 있는 섬뜩함 앞에서의 도피인 것이다. 이 섬뜩함은 현존재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비록 두드러지게는 아니지만-그의 일상적인 ‘그들’ 속으로의 자기상실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협은 현사실적으로 일상적인 배려의 완전한 확실성과 충족성과 같이 병행할 수 있다. 불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피어오를 수 있다. 사람이 보통 쉽게 섬뜩함을 느끼는 그런 어둠이 필요하지도 않다. 어둠 속에서는 강조된 방식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세계는 바로 “거기에” 여전히, 그리고 더 절실하게 있는 것이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2009, 258쪽)
이러한 감정에 시달리게 된 한명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꾸게 되고 아버지를 찾기로 결단한다. 한명재는 아버지에 관한 꿈을 꾸기도 했지만 그 낯선 꿈과 낯선 감정이 모두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지시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 아래에서 평안하게 살던 자신에게 찾아온 낯선 감정의 원인은 꼭 아버지에게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아니,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일이 갑자기 심각한 문제의 진앙이 되어 이제까지의 안전하던 삶을 흔들어놓는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한낮의 시선, 50쪽) 이에 대해 한명재의 이웃은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문제는 사라진 그것이 기회가 되면 일그러진 형태로나마 자기를 드러내려 한다는 데 있어. 존재하는 것들은 다 표현하려고 하지. 그럴 때 기억의 임자몸은 매우 힘든 동통에 시달리게 되는 거고. 바닷물을 다 퍼내든지 바닷물 속으로 몸을 집어넣든지 해야 하니까.”(한낮의 시선, 51쪽)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한명재가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존재 혹은 존재 자체를 찾으려는 사람은 우선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한명재는 자기 존재를 찾는 이이기에 아버지를 찾고도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렸던 것이다. “압박해오는 것은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눈앞의 것을 합한 총합도 아니다. 그것은 (···) 세계 자체이다.”(존재와 시간, 254~255쪽)
하지만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여정의 시작 역시 불시에 덮친 두려움과 불안이며 더 이상 이전처럼 동일한 상황에서 평안함을 느낄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혼란이다. 그래서 한명재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혼란스러운 마음은 뭐지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는데, 불편하지도 않고 불만도 없는데, 아버지는 필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없는 것과 같았는데, 없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예 없다는 의식조차 없었는데, 왜 갑자기 아버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되어버린 걸까요? 이 모순된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요?”(한낮의 시선, 69~70쪽)
즉, 한명재가 위와 같은 혼란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찾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존재이며, 따라서 한명재가 대면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 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존재 자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원치 않는 대상과 원치 않는 방법으로 대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냈지만, 그 불안감이라고 하는 것에도 무언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원치 않아 하면서도, 실은 원치 않는 대상과 대면하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원치 않는 대상과 조우를 원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나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정말로 원하지 않는 대로 될까 봐 불안해하고, 원하면서도 정말로 원한 대로 될까 봐 마음 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카오스, 땅은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한낮의 시선, 59~60쪽) 이때, “카오스, 땅은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는 아무래도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창세기의 첫 구절에서 알려오는 것은 존재 자체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한명재는 어머니와 애인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고 겨우 찾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며 종국엔 한낮에 본 ‘알몸의 남자’와 합일하는 체험을 한다. 한명재는 아버지에게 부정당한 충격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진 후 꿈에서 어머니의 별장이 있는 천내에서 본 알몸의 남자를 만났다. “옷을 입지 않은 채 숲은 걸어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 남자는 나를 보자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고 환하게 웃었다. (···) 무엇인가가 나를 들뜨게 했다. 나를 그를 따라 옷을 벗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기보다 그러고 싶었다. 옷을 벗는데도 부끄럽거나 쑥스럽지 않았다. (···) 키 큰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이 내 정신과 영혼을 말갛게 정화시키는 듯했다.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 남자처럼, 그 남자를 따라, 빛처럼 환하게 웃으며 걸었다. 한없이 투명해진 몸이 무한한 공중에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한낮의 시선, 210~211쪽)
위와 같은 꿈을 꾼 후 한명재는 천내에 가고 싶은 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데, 다음의 고백을 통해 한명재의 여정이 겨냥한 것은 과연 아버지가 아니라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깊은 곳, 하늘을 받치고 선 키 큰 나무들과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 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이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그루 나무처럼 햇빛에 휩싸인 채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한낮의 시선, 212쪽)
그런데, 명재를 이 체험으로 이끈 것은 불안이다. 불안이야말로 나를 세계 자체 앞에 데려다 놓으며 비본래적인 삶의 연관에서 나를 분리시켜 본래적이며 개별적이며 고유한 자기 존재를 문제 삼게 하기 때문이다. 불안이야말로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하는 감정이라는 점은, 하이데거의 다음의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불안 속에서 주위세계적인 손안의 것이, 세계내부적인 존재자 전체가 가라앉아버린다. “세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타인들의 더불어 있음도 그렇다. 불안은 이렇게 현존재에게서, 빠져 있으면서 자신을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버린다.”(존재와 시간, 256쪽) 아닌 게 아니라 불안이라는 감정이 한명재에게 어머니와 애인의 사랑과 보호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던 아버지의 존재를 상기시켰으며 그것과 대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하나의 사랑을 느끼게 했으며 자기 존재를 그것과 연관시키게 했다.
한명재는 이 소설의 끝부분에서 다시 『말테의 수기』를 떠올린다. “그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사랑이 무의미하고 오직 하나의 사랑만이 필요하다. 그를 사랑할 수 있고, 그가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는 오직 한 분이다. (···) 나는 말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를 둘러싼 모든 풍요를 도리어 끔찍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단 하나의 결핍.”(한낮의 시선, 207쪽)
아버지를 찾고 만나고 부정당하고 부정하는 한명재의 여정을 통해, 그리고 그의 여정을 이끌기 시작한 불안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며, 불안이야말로 나를 고유한 개별자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은 현존재를 개별화시키며 그래서 그를 이렇게 “유일한 자기”로서 열어밝힌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론적인 “유아론(唯我論)”은 하나의 고립된 주체사물을 무세계적 사건발생의 해(害)가 없는 공허 속으로 옮겨놓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은 현존재를 바로 극단적인 의미에서 세계로서의 그의 세계 앞으로 데려오며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그 자신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존재와 시간, 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