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리지날이 될 수 있을까.
변덕스러운 마음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중충한 하늘이 원망 스러 고개를 든다. 구름을 보는 순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태양에도 짜증을 낼 수 있다. ’ 우리‘라고 통칭할 만한 대부분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고 또 살아간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진보의 속도가 세상의 변화가 얼마나 빨라지던 간에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사람들은 그를 거부한다. 완고하게, 암초처럼 완고하게 시점을 특정해서 굳어버리고 그런 사람들은 진보라는 배에 딴지를 걸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행동한다. 암초는 가만히 있는 미덕이라도 발휘할 줄 안다. 그들은 타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기 때문에 끔찍하다.
처음부터 인류에 감정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두를 멸시하거나 경멸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를 향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글로 적어 전서구에 매어 날리자 전서구의 목을 꺾어 척추를 뽑아낸 사람들. 사람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통상은 들키지 않아서. 하지만 누구도 CT를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 당신의 거짓을 당신보다 투명하게 볼 줄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다. 경멸을 더할 뿐. 이익을 좇지 않으면, 통찰할 수 있다.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 다만 머무르며 나쁜 것은 나쁜 이들에게, 좋은 것은 좋은 이들에게 돌려준다. 더하고 빼서 무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어떤 얽매임도 없이 훌훌, 떠날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쩌랴, 눈부신 태양을 보며 짜증을 내었다는 사실이 사무친다. 태양은 아무 감정이 없고, 영원한 세월을 빛난 것처럼 빛날 뿐이고, 채 100년도 존재하지 못할 존재가 저의 기분에 따라 현상을 왜곡하는 부조리를 행하고 또 깨닫는다. 행하고 또 깨닫는다. 행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시인이 노래하길, 스스로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공감한다.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은 결국 바람에 기댈 수밖에 없다. 부모로부터, 부존재하는 형제로부터, 혈통도 돈도, 직업도 학벌도 없는 사람은 미치지 않으려면 뛰쳐나가 바람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맨몸으로 200km/h가 넘는 속도에 ‘매달려’ 온몸을 내던지는 행위. 그런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엉겨드는, 언제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는 막막함에 한참을 혹사당한 후에야 ‘매달리는’ 법을 배운다. 매 순간 죽음에의 유혹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다가 어느 순간, 이 유혹이 내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달리곤 했다.
옳지 않은 것들과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진흙탕에서 뒹구는데 진흙이 묻지 않길 바라는 것은 어떤 일인가. 지켜야 하는 것들은 분명 저 진흙 구덩이 속에 있다. 그걸 피워내면 연꽃이다. 그를 피워내지 못하면 미꾸라지가 되어 더러움을 더한다.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도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뿌린 대로 거두게 하고 더하고 빼기 전에도, 더하고 뺀 후에도 아무것도 없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쁜 것들은 쉼 없이 들이닥치니 그저 나쁘게 되지 않는 것만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기분이랄까 마음, 그런 것들이 자의식이 된다. 기분도 마음도 내가 아니면 된다. 자아란 없다. 호흡하는 순간 우주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이 나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를 깨어있음이나 알아차림이라고 부른다. 두 경지는 순간에 이뤄진다. 이뤄지고 나면 돌아갈 수 없으나 오직 탐진치만이 그를 되돌릴 수 있다. 무심하라. 무아하라.
모르는 것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자명한 진리는 늘 어겨진다. 그렇다. 알면서도 지키기 어려워야 ‘진리’가 된다. 호불호에, 상황에, 가로막힐 여지는 얼마든지 많고 그래서 진리는 은은한 빛으로 자리를 지킨다. 현란한 것들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발치에서 다시 진리를 집어들 수 있다. 물론 현란한 것들에 눈을 많이 두면, 진리의 은은한 빛조차 안 보일 때가 있다. 아예 철저히 타락하던가,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 좋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쉽다. 나를 돌보지 않으면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어렵다. 나를 돌보지 않으면 된다. 양날의 검이란 표현을 많이 쓰는데, 어떤 힘이든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옳은’ 방향, 그러나 옳은 방향의 허무함과 맹랑함은 힘이 있으면서도 힘을 쓸 줄 모르는 장사와 같다. 마찬가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깨달음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읽고 걷고 생각하는 것인가? 읽고, 걷고, 생각하는 것.
무엇을-어떻게-왜
배우고-실천하고-반성하는 것.
삶의 마지막을 깨닫고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를 묻고 싶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모든 것의 종말을 앎에도 하나하나의 개별적 만남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또 떠나가는 것들을 잡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 어려운 경지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닿음’이 당신이라는 것은 형용하기 어려운 우주의 난해함은 아닌가.
쉼 없이 손을 놀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쉼 없이 손을 놀리는 것뿐이다. 타자기 앞에서 피를 토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타자기가 피를 토하게, 키보드가 먼저 박살 나기를 기다리며 참혹함을 적어낸다. 적어도 덜어지지 않아서 참혹함을 더한다. 켜켜이 참혹하다.
무서운 흉통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없는 이 흉통은 ’오리지날‘을 낳기 위한 산통이려나. 나이가 들어가고 죽음에 다가간다는 자각이 이렇게 분명한 적은 없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오래오래의 기치를 분초로 쪼개어 생각하는 내가 이럴진대 무심히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은 이런 고통에 초연한 것인가. 아니면 이게 삶을 살아가며 지불하는 비용인 것인가.
오리지날에 대해 얘기를 해야겠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만 태양은 적어도 우리 항성계에서 오리지날을 다툴 수 있지 않을까. 거슬러 오르다 보면은 결국 우주가 시작된 한 점에 수렴하는 것은 아닐까. 오리지날은 없지만 모두가 오리지날을 꿈꾼다. 매력인지 마력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곧 힘이다.
힘을 가지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은 아이디어는 많다. 그러나 그 좋은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오게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산통이 있어야 힘을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는 산통을 일으킬 최초의 동력을 자처한다. 인류의 산파가 되고 싶다. 그러나 울부짖는 마음을 쏟아낼 방법을 찾지 못해서 울부짖음이 지쳐 잦아들까 겁이 난다.
부자유와 부조리에 대해 생각을 한다. 정성스레 일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이 머무를 수 없는 직장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어떤, 스스로 창조해야 할 어떤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오리지날이 아닌데 오리지날리티를 희망하는 부조리를 견뎌야 하고, 그를 위해 획득해야 하는 부자유에 대해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이렇게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버티면 오리지날이 될 수 있을까.
창이 있고 풍경이 있다. 어느 풍경을 바라보던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이고, 결국은 나무 한 그루 찾기란 어려웁지 않다. 그래 나무는 저마다 푸릇함을 띄는데, 그 정도가 다를 뿐인 푸릇함을 띄는데 우리는 그러한가. 자문한다. 자답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기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