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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st Aug 05. 2024

세어보기나 했어?


학생 : 선생님, 이 문제 모르겠어요.


나 : 이거 그냥 x에다가 숫자 넣어봐.


학생 :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넣어봐요?


나 : 아무거나 넣어봐 일단.


학생 : x에 1 넣으면, 음.. 1/3 나와서 안돼요.


 : 계속 넣어봐.


학생 : 2 넣으면, -1 나오니까 돼요!


 : 거봐. 또 넣어봐.


학생 : 3 넣으면, 음... 분모가 0이 되어서 안되고,

4 넣으면, 3 나오니까 이것도 되네요!

5 넣으면, 2가 나오니까 이것도 되고요.

6 넣으면, 5/3 나오네요.


이쯤 되면, 학생은 한숨이 나오면서 슬슬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냐'는 표정을 내보인다. 자칫 더 밀어붙였다간, 수학을 포기할 기세다. 얼른 다른 문제로 전환했다.


 : 자, 그러면 이 문제 풀어봐.



학생 : 이건 좀 쉽네요?

1 넣으면, 2.

2 넣으면 1.

총 2개요!


나 : 아니. x, y가 무슨 수야?


학생 : 자연... 아니 정수요.

아..! 잠시만요. (뭔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1을 넣으면 -2 나오고,

-2 넣으면 -1 나오니까,

아까 1,2 넣은 것까지 합하면...


음...


총 4개요!


 : 그렇지. 뭐 느끼는 거 없어? (패턴 발견한 거 있냐고!)


학생 : 음, x가 2의 약수이어야 한다?


 : 그럼 이 문제 풀어봐.

학생 : x-3이 2의 약수이어야 하니까, x-3 은 +2, -2, +1, -1

x-3=2 → x=5

x-3=-2 → x=1

x-3=1 → x=4

x-3=-1 → x=2

총 4개요!



 : 자, 그러면 원래 문제로 돌아와서, 이 문제 다시 풀어봐.


학생 : 이것도 x-3이 2의 약수라고 하면 돼요?


 : 한번 넣어봐~


학생 : 어, 되네? 그럼 이것도 4개요!


항상 이런 식이다. 일일이 세어보고, 나열하고, 대입하면서, 규칙을 찾아내는 것이 수학적, 과학적 사고인데, 이 단순한 행위를 시. 도. 조. 차. 하지 않는다.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째, 초등학교 수준처럼 너무 시시해 보여서다. 고등학교 수학이라면 좀 멋들어지게 문자로 표현해야 하고, 수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의외로 체면 따지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기초가 약하니 중학교 함수 부분 좀 공부하자고 해도 자기는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겠다고 한 고1 학생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수식과 멋들어진 풀이의 근원에는 일일이 세어보고 규칙을 찾는 사고 과정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 어떤 숫자를 넣어야 하는지, 그 숫자들을 얼마나 많이 넣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막연해 보이니 애초에 시작조차 엄두가 안 나서 포기하는 게 대다수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 서서 광대한 우주를 마주하는 공포와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 숫자나 넣어보면 큰 가닥이 잡힌다. 계속 넣다 보면 어떤 크기의 숫자를 넣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힌다. 그렇게 숫자를 점점 대입할수록, 그 규칙이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숫자나 적용해보는, 첫발 떼기가 정말 중요하다.


[수능 출제 매뉴얼]에 보면, 수험생의 수학적 능력을 4가지로 분류하여 측정한다. 그중 하나가 '발견적 추론 능력'이다. 귀납적 사고라고도 한다.


[수능 출제 매뉴얼에 명시된 '발견적 추론 능력]


발견적 추론은 몇 개의 샘플을 통해 규칙을 발견하고 일반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데이트 한 남자 여러 명의 공통적인 특성을 뽑아내어, '남자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능력을 위해선, 아주 어릴 적부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어야 한다. 초등학교 때 하는 [일일이 직접 세기] 같은 활동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수학 전반적으로 모든 단원에서 이런 사고가 필요한데, 특히, 고등학생들이 '확률과 통계' 단원을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직접 세기 경험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 많은 학생들은 '직접 세기 경험'이 부족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선행학습'이다. 선행학습은 그런 시행착오의 기회를 박탈시키고, 바로 공식이 주어진다. 일부 영재나 그 나이대에서 겪어야 할 충분한 시행착오와 사고 과정을 거친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준에 맞는 선행학습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은 부모 손에 이끌려, 혹은 너도 나도 하니까, 불안감에 휩쓸려 자신의 수준도 모른 채, 선행학습 열풍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다면, 학원가에서 행해지는 선행학습은 어떠한 모습일까?(국가기관에서 이뤄지는 영재교육과는 다르다) 선행(先行). 즉, 먼저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진도'를 더 빨리, 더 많이 나아가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얼마나 제대로 다져놓고 가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학부모들이 그렇다. 오직 '진도'를 '얼만큼' 나갔는지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정말로 이 개념에 대해 소화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 그저 진도를 나가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쉴 뿐이다. (이해도 못 해놓고, 왜 안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학원에서는 진도에 대한 컴플레인이 의외로 많이 들어온다. 심지어 진도가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퇴원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수학은 타과목과 다르게, 빠르게 대충 아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공부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문제에서 필요한 개념이 5개라고 쳐보자. 이 5개 중, 어느 한 가지만 부족해도, 못 풀게 되는 것이 수학의 특징이다. 국어나 영어의 경우, 단어 하나를 모른다고 해서, 전체 의미를 파악하는데 문제가 없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 이런 특성 탓에, 수학은 확실하게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어설프게 알면, 무조건 틀리는 게 수학이다. 그러므로, 수학에서는 빠르게 대충 아는 것은 사실 모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을 강사가 학부모에게 설명해도,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하지만, 결국 '그래서 진도는?'으로 얘기가 끝이 난다. 이런 시장 상황에서, 어느 강사가 대범하게 느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어느 강사가 10문제 풀 시간에 2문제를 깊게 고민하며 풀라고 시간을 할당할 수 있을까? 강사가 이러한 환경에 역행하는 교육철학을 고수하는 것은 외롭고 힘든 고난의 길이다. 천천히 나아가는 교육은 성과가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고, 고객들의 인내력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러기에 이것은 강사 생명을 걸고 나아가는 도박일지도 모른다. 또한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대세의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육방식을 감행하는 위험은 누구에게나 두려울 수밖에 없다. 내 소중한 자식의 미래는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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