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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st Aug 05. 2024

수학 강사들의 딜레마

예전 학원에서 노장샘한테 수학 문제 몇 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말이 이리저리 전달되어 당시 학원 원장에게 내가 실력이 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장이 생각 없이 말을 와전시키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원장실을 나와, 그 노장샘에게 찾아가 따지기도 그렇고 해서, 속으로 화를 억누르기만 했다.


그 이후로, 그 노장샘과는 거의 말 한마디 섞지도 않고, 인사도 안 하고 지냈는데, 내 문제풀이 실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유로 그 학원을 그만둘 때쯤, 떠나는 마당에 자초지종이라도 알고 싶어 그분에게 말을 건넸고, 잠시나마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결론은 자기는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없고, 그럴 만큼 야망이 있지도 않다고 했다. 평소 행색으로 봐서, 그럴 분이 아님은 짐작은 했지만, 이래저래 사람관계가 꼬일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꼬이나 보다.


여하튼, 이런 얘기를 알고 지내던 다른 학원 원장님과 술자리에서 만나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분이 대뜸 하시는 말이, "그건.... 강사들 사이에 불문율인데.."라며 운을 뗐다. 긴 얘기를 요약하자면, 수학 강사가 다른 강사에게 수학 문제를 물어보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라 하셨다. 다시 말해, 절대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생각해서, 상대 강사가 나에게 (나한테는 풀 수 있을 만큼 쉬운) 문제를 물어봤다 치자. 나는 아마도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강사의 실력의 단면을 무의식적으로 재단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못 푸는 강사]라는 어떤 이미지가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 당연하다. 물론, '뭐 모를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치열한 경쟁의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남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강사로서, 본능적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평가습관이 슬며시 일어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일전에, 대학생시절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당시 의대생이었는데, 과 TOP 일 정도로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 친구 왈, '여기서 공부 조금 못하면, 병신취급받아...'


내 기억에 그 친구는 악바리에 독종이고, 자존심도 무지하게 강한 녀석이었기에 아마 그런 취급받기는 죽어도 싫었을 것이었다.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 학원가에 내가 입성하고, 학원 분위기를 파악할 때쯤, 그 의대생 친구의 말이 여기 학원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옆에 있는 강사는 동료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실력이 부족해 보이면, 그 눈빛에 상대를 밑으로 내려보고 있음을.... 나는 느낀다.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하겠지만, 겸손한 척하는 입에는 고상한 단어를 내뱉겠지만, 내가 하는 말에 '그 문제집은 별로 안 좋은데..?' 라며 말하는 작은 태클 속에는 내 의견을 슬며시 무시하는 고(高)자세에서 은밀한 멸시가 드러난다.


그럼 나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왜 바보같이 동료에게 자꾸 질문을 하는 전략을 취했나? 문제풀이가 약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숨긴다 한들,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겠거니와, 나는 다른 부분에서 뚜렷한 강점을 갖고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속으로 끙끙 앓으며 인터넷카페에 질문하고, 더딘 피드백을 받기보다, 더 빨리 배워서 성장하는 것이 내 체면과 자존감을 진짜로 높이는 길일 것이기에, 현재 내가 당하는 암묵적인 멸시는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멸시..라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나의 자격지심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과연 이 선택이 옳은가.... 의문이 든다. 질문을 마음껏 하지도 못하고, 속내를 편하게 말할 수 없으며, 평범한 회사원과는 다른 삶을 이해받기도 어려운, 이 놈의 직업.


강사는 참 외로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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