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현실 위에 태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실재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 곧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매일같이 마주하고 다루는 현실의 작은 일 하나하나에까지 모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쁄라의 땅에서 발견합니다. 속세에서 쓰는 문장 하나가 잠시 떠오릅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 해도 여한(餘恨)이 없다." 솔직히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 쁄라의 땅을 걷고 있는 한, 이것 만한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우리를 모두 엄청나게 많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순례자는 마법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이상하게 마법의 땅에서는 졸음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목자들이 조심하라고 일러 준 땅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 졸음을 참아가며, 쁄라 Beulah(사 62:4)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새들이 계속 노래를 하였고, 땅은 꽃으로 덮여 있었으며 비둘기의 울음소리도 들렸습니다. 이 땅에는 해가 밤낮으로 빛났습니다. 이곳은 천국의 경계 땅으로 순례자들은 달콤한 휴식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성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커다란 음성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사 62:11).
쁄라의 땅 사람들 Beulah(2023)
드디어 이들 앞에는 천성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급류가 흐르는 강이 놓여있었습니다.
갑자기 천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천성문으로 가려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늘 문에 닿기 전의 마지막 관문입니다." 크리스천이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요? 건너기 좋을만한 장소를 골라야 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건널지 계획도 좀 짜고... 또 돌아갈 길은 없나요?” 다시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발을 딛기 전까지는 강이 보이지 않을 거요. 돌아갈 길도 없고, 당신들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거룩한 황홀함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 크리스천으로 쁄라의 땅에서 휴식과 영적인 충전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동안은 못다 한 순례길을 걷습니다.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사이로 꾀꼬리 두 마리가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 자연과학자의 눈에 포착됐습니다. 그 모습은 한 생명체 속에서 일어나는 황홀한 순간이었습니다.
현대 과학자, 특히 동물행동학자들은 이것을 외부자극과 내부자극인 호르몬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라는 이 행성은 태양의 주변을 시속 10만 km가 넘는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그것도 365일을 주기로 해서 천지가 창조된 이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태양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기에 빛의 양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이 빛은 꾀꼬리의 시각(눈)을 통해 뇌하수체를 자극합니다. 뇌하수체는 가는 혈관을 통해 성선자극호르몬을 내보냅니다. 이 호르몬은 다시 생식기에 도달하여 성호르몬의 분비로 이어집니다. 이 호르몬을 과학자들은 웅성호르몬이라고 부릅니다. 이 웅성호르몬은 수컷이 노래를 부르게 만듭니다. 이 노랫소리를 귀로 들은 암컷은 수컷과 짝짓기 할 준비 태세를 갖추고 둥지 짓기에도 관심을 쏟습니다. 이때도 암컷의 몸속에는 황홀함으로 이끄는 호르몬이 흐름니다. 바로 암수가 자웅을 겨루면서 황홀경에 빠져들게 됩니다. 암컷은 다시 둥지를 만들고 싶은 호르몬인 프로락틴을 분비하고, 가슴 깃털이 빠지면서 그곳엔 맨살을 드러냅니다. 이때 어미는 알을 낳고 깃털이 빠진 맨살을 대고 어미의 따듯한 열기를 발산합니다. 그동안 이 새들의 몸 속에 황홀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쁄라의 땅에서 노래하는 꾀꼬리(2016)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이 생명체를 만들고서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성경의 아가서에서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황홀함을 읽힙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1-13).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섬세하고 지극하십니다. 산의 옹벽 돌틈새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아무도 눈여겨볼 수 없는 아주 작은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너무 작아 주변의 들고양이마저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막 어른 엄치 손가락 크기도 안 되는 진박새 한 마리가 부리에 파란 이끼조각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틈새로 자취를 감추었을 때, 진박새 좁쌀 크기의 눈만 돌틈사이로 반짝거렸습니다. 파란 이끼조각은 이제 곧 알에서 깨어 나올 새끼들에게 습도를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자연 적응 행동이라고 합니다. 문화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겐 건조한 계절, 아기가 자고 있는 방안에 가습기를 켜두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작은 생명체를 만드셨 때 부터 이런 지혜를 허락할 만큼 참으로 섬세한 사랑을 베풀고 계십니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유명한 설교가였던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책 '새, 우리들의 선생님(Birds our Teacher)'에서 하나님이 까마귀를 먹이시는 것에서 믿음을, 황새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회개를, 독수리가 나는 것을 보며 자유를, 종달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기쁨을 배운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는 꾀꼬리의 자웅을 겨누는 모습에서 이 땅에 아직 죄가 들어오지 않았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 행성에는 죄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바로 아담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잘못을 범해 우리 모두가 죄와 죽음이라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롬 5:18). 그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천국과도 단절이었습니다. 그 단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한 사람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순례길에서 그 단절을 거두워 가실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신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성 이시돌 순례길 2
주님께서 공생애에 장님을 눈뜨게 한 조형물 앞에 섰습니다. 그 조형물 앞에서 스케치 북을 펴 들고 주님께서 병자를 치료하셨던 지난 2000년 전의 시간을 담아봅니다. 예수께서 소경 된 사람을 보시고, 흙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반죽을 이겨서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시라." 그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요 9:6-7). 이 대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정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소경 된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녹내장이나 백내장을 앓고 있는 환자도 아니었습니다. 망막의 신경세포 어디에선가 선천적 장애로 태어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였습니다. 그런 환자를 예수님은 소경 된 이의 눈에 침을 발라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치유하시다(2023)
제자들은 예수님께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이 사람을 보고 그 원인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자기의 죄 때문인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경 된 이유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죄로 인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과 빛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요 9:3-5).
혈루병 여인(2022)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표적 말고도, 문둥병과 혈루병을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나는 여기서 주님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주님! 내게도 이런 치유의 능력을 주실 수 있나요?" 성경에 보면 제자들의 이런 능력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내려졌습니다. 물론 나도 기도하고 간구하면 제자들처럼 치유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살펴보면 병고치 신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소경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제자의 발을 씻는 예수의 모습에서 주님께서 내 발을 씻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네 이웃의 발을 씻겨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내 지친 발을 씻기시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내 몸이 땅에 닿는 바로 그 부위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분은 무릎 꿇고 손으로 내 발을 들어 씻기십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빛을 맞주치며 말씀하십니다."내가 네 발을 씻어 주었으니, 이제 너도 지금부터 네 이웃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네가 모범을 보였으니, 너도 내가 한 그대로 하여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거든 너도 그대로 행하여라. 복된 삶을 살아라"(요 13:13-17). 크리스천으로 사는 겸손을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시다(2024)
내가 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때, 내 몸 속에 전립선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시한부 암 선고라고 할까요. 이제껏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내 몸도 죽음의 강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노년기의 전립선암 발병은 전립선암으로 사망할 확률은 25%라고 합니다. 나머지 75%는 다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일이라 마냥 슬픔에 빠져들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5:9-10)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몸으로 행한 모든 일에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은 우리 앞에 무릎 꿇으신 주님을 보고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 몸의 온전한 의미를 알게 된다. 내 몸은 쾌락과 고통의 시한부 도구 훨씬 이상의 것이다. 내 몸은 하나님께서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려 하시는 집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과 다른 이들의 몸에 베풀어진 돌봄은 진정 영적인 행위다. 그것을 통해 우리 몸이 영광스러운 체험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사랑
마지막 순례길에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내게 주님은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순간 순간의 삶을 통해 네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의 덕목( 믿음, 소망, 사랑)가운데 사랑이라는 덕목을 믿음과 소망보다 더 으뜸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사랑의 전부인양 오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비를 베푸는 마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 지나치게 강조될 수 있어 우리 사회에서 늘 논란거리게 됩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닌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한 사랑은 배워서 익혀야 한다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여기서 잠깐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사랑은 의지(Will)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38)는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사랑의 감정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감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또 우리에게는 그런 감정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감정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실행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그러나 죽음의 강을 앞에 둔다고 하면 사정은 다름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내 죽음 마져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탄식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5:4-5)"
크리스천이었던 윤동주 시인의 시 귀절 하나가 생각납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는 일제 강점기에 모진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의 강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 즉 영원한 삶을 아름다운 시귀로 우리들에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면 복을 받고 사는 삶이라고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 살고 죽는 것은 그리 큰 관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창기세 4장은 가인과 그의 동생 아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창 4:2-4)"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 결국 가인은 몹시 화가 나,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내가 창세기를 읽었을 때, 이대목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는 제사를 받으시고 인정해 주신 아벨을 일찍 죽음을 당하게 하셨나?
신약성서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 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았지만(마 11:11), 예수님보다 일찍 헤롯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막 6:17-28)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 인간들이 오래 사는 것에는 별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고후 5:1)라고 고백합니다.
죽음의 강을 목전에 두고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은혜를 펼치시며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성대한 잔치에 비하면 지금의 삶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지고 말지만, 보이지 않은 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