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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Sep 10. 2024

우울증을 앓고있는 회사원인 당신에게

2019.03~04


우울에 빠져 무기력하게 있으면 혹자는 '정신력의 문제다. 정신력이 약해빠졌다.'며 비난할 테고, 또 다른 이는 '그래도 힘을 내서 뭘 해야지. 가만있으면 어떡해.'라고 이해는 하지만 공감 가지 않는 상황에 안타까워할 것이다.


10년 넘는 기간을 마음속에 이게 우울인지도 인지를 못한 채 품고 살다, 꾹꾹 욱여넣지 못해 터져 버려 약과 상담으로 7년을 버텨온 내 입장에서 둘에 대한 사견은 어떻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일은 공감하지 못한다. 이해는 할 수 있다. 힘들었겠구나. 참 아팠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결코 그 누구도 해당 상황이 되어 보지 않고는, 온전히 그 일을 겪는 사람의 뼛속깊이까지 공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끼는 사람들을 보면 생각이 성숙한 사람이구나 생각한다.(나부터도 이렇지 못하다. 남의 일에 왈가왈부 호기심을 가지고 첨언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분을 존경하고 스스로 깊이 반성한다.)


우울증은 혼자만의 싸움이다. 내 마음속 떡이 져버린 응어리를 언제까지고 누가 보듬어 주기를 바라고, 토해내며 공감을 바랄 수 없다. 처음에는 위로와 응원을 전달하던 주변인도 '대체 언제까지 저러냐'며 질려서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 내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 일상생활 속에서 툭하면 우는 이유,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씻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생활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남들은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기를. 당연히 극단적인 생각도 많이 했고 시도도 해봤으나 직전에서 멈추었다. 아프게 죽기는 싫었으니까. 누군가 고통 없이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미어질 듯이 저리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우울했는데도 나 자신의 목숨을 결국 끊지 못했는데, 저들은 얼마나 더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실행한 걸까 싶어서.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족. 그게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울증 진단검사에 이런 항목이 있었던 것 같다(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도 슬퍼할 이가 없다. --> YES


검사 당시 정말 'YES'일 것 같아서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약물을 복용하고 상담을 받으 차츰 증상이 완화되자 가족이 뇌 한구석에 진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그들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 정말 슬퍼할 것 같았다. 이 생각의 변화가 장족의 발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뜨기 싫어도 눈을 떴다. 아침 6시 50분에 일어나 씻고, 출근을 했다. 몸이 너무나 축축 처지는 날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도살장 끌려가는 소마냥이라도 운동을 하러 갔다. 그럴 때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를 주문처럼 외웠다.(<공황장애 환자의 신입사원 생존기 22화> 참조)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살기 위해 먹었다. 식욕은 전혀 없었지만 먹어야 살 수 있었다. 밥을 욱여넣고 잠자리에 누웠다. 8시. 이르긴 했으나 그냥 누워있었다. 그러다 룸메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을 해야 했다. 룸메와 얘기를 나눌 만큼의 에너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최소한의 숨만 쉬며 몇 시간을 버텼다.


회사에서 숨이 막히면 외출을 쓰고 상담센터로 달려갔다. 상담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나를 따뜻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두서없이 말을 토해내도 묵묵히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줬다. 선생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차오른다. 내 인생에 있어 정말 감사해야 할 분들이 몇 분 계신다. 그중 한 분이 상담선생님이다. 그분께 감사 표현은 많이 했지만 그걸로도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남자친구. 그가 없었다면 내 삶이 거기서 끝날 수도 있었기에 참 감사했고, 앞날에 꽃길이 펼쳐지길 깊이 응원한다.






뭐가 되었든 나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회사 생활은 여전히 미팅도 회식도 많았고, 치이고 지쳤지만, 몰래 화장실에 숨어서 울면서 마음을 삭혔다. 퇴근 후에도 나만의 공간은 없었다.(그래도 지금생각해 보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싶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룸메가 있었던 게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회사에서 몰래 약을 입에 털어놓고, 혹시 그걸 본 누군가 물으면 어물쩍 핑계를 댔다. 우울감이 몸집을 불려 나를 삼켜오는 날이면 만사 제치고 상담선생님한테 달려가서 마음을 털어냈다. 빈껍데기처럼 운동을 하러 질질 나를 끌고 갔고, 주에 한 번씩 영어스터디에 참석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활기를 조금씩 찾아갔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거대한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한 발자국씩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위에서 말했듯,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인 '가족'을 떠올리지 않았나. 나는 앞으로 가속도가 붙어 보폭을 더 넓혀 회복할 거다. 나는 나를 믿는다. 우울증은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참 많은 도움을 받았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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