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미친 듯이 뜀박질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니 덩치가 큰 경주마가 길을 잃고 망나니처럼 뛰어다니는 모양새다. 불규칙하게 휘몰아치는 박동소리에 새벽 내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꼬박 날을 새고 퇴근 후에 병원을 찾았다. 정확한 기록을 보기 위해서는 24시간 심전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누워서 전극을 붙이고 몇 분만에 떼는 심전도는 몇 번 해본 적이 있지만 24시간 심전도는 생소하다. 상체 이곳저곳에 전극이 달린 패치를 붙이고, 홀터라고 불리는 심전도를 기록해 줄 모니터 기계를 옆구리 쪽 바지춤에 부착한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이러고 내일 회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난감하다.
홀터 모니터는 작은 직사강형이다. 옆구리에 차고 다니니, 미화원 아주머니가 "가방 참 앙증맞고 이쁘네."라고 웃으며 칭찬해 주셨다. 나는 환한 미소로 답했다. 다행히 작고 위치가 허리춤이다 보니,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 모양이다. 빨리 뛰거나 심장에 무리가 가는 행동을 하지는 말라는 주의를 들었다. 검사결과를 보는데 지장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평소보다 한 템포 더 느리게 걷고 짐짓 여유롭게 행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심장이 평온한 것 같기도 하다.
퇴근 후 몸에 붙인 패치를 떼러 갔다. 홀터를 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 결과는 이틀 후에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고작 하루 패치 몇 개를 몸에 붙이고 있었다고, 이걸 떼내니 한결 편하고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항상 아파봐야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24시간 심전도 검사의 결과는 '살짝 부정맥'이었다. 부정맥이 있긴 하나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심장 건강을 위한 관리법을 몇 개 들은 뒤, 병원을 나섰다. 혹시나 해서 심장 검사를 한 거지만 사실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1년 반 전, 처음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도, 심장 문제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우울과 불안, 그리고 공황. 또 내가 앓고 있는 갑상선 질환의 영향으로 심장이 두근거렸을 거다. 다행인 한 편 서늘한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나는 영원히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우울과 불안이란 토네이도 안에 휘말려 질식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서글프게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짐하지 않았나. 우울증 극복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아, 두 달간 휴직했던 동기언니도 돌아왔다. 두 달간의 휴직이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언니의 얼굴은 차원이 다르게 활짝 피어있었다. 깊게 드리워진 그늘이 말끔히 치워지고 그곳에 햇살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참 다행이다. 언니가 밝아지니 나도 덩달아 힘이 생긴다. 나도 두 달간의 휴직을 내면 회복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휴직을 낼 용기가 없었다. 지금 내게는 천근만근인 몸을 질질 끌고서라도 회사를 다니는 게, 휴직을 하면서 이런저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몇 달간의 업무를 팀원들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부담스러운 선택이었다.
정신없이 5, 6월이 흘렀다. 첫 해외출장을 중국으로 다녀왔다. 연차가 쌓인 만큼 좀 더 부담스러운 업무들을 맡게돼 일의 효율성과 결과의 달성을 위한 고민도 많이 했다. 이주에 한 번씩 빼먹지 않고 정신과를 찾았고, 상담은 주에 두 번씩도 갔다. 영어스터디도 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갔다. 새로운 멤버가 셋이나 들어왔다.
주말에는 동기언니와 함께 보육원 봉사활동도 다녀왔다. 마냥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신난 아이, 낯선 이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듯 경계하는 아이, 어딘가 모르게 잔뜩 움츠려져 있는 아이. 다양한 아이들을 만났다. 그 아이들의 모습에 자꾸만 날 투영해서 봤다. 눈물이 차올랐다.
장을 봐 온 고기를 아이들과 함께 구워 먹고 축구를 했다. 어느덧 땀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들의 얼굴은 이전보다 확실히 밝아져 있었다. 나는 구석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축구 같이 하기 싫어?"
"......."
"언니도 공 무서워해. 그래서 항상 피구나 축구 같은 거 하면 어떻게 아프다고 거짓말하고 빠지지 생각했어."
여자아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너 원피스 되게 이쁘다."
"어떤 아저씨가 사줬어요."
"아. 그래? 되게 좋은 아저씨구나."
"가끔 여기 오는 아저씨 있어요. 먹을 거랑 옷이랑 사서 나눠줘요."
여아자이는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고기 맛있었어?"
"네. 맛있었어요. 그런데 언니. 다음에 또 여기 올 거예요?"
쿵. 심장이 다시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은 너무나 티끌하나 없이 맑게 반짝이며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거기는 어떤 소망, 기대, 그리고 작은 믿음이 담겨있었다. 히지만 나는 흔쾌히 "그럼."이라고 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색하게 그 자리를 뜬 것 같다. 뒤돌아서서 여자아이에게 멀어지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 없었다.
대학시절 다문화가정 봉사활동을 할 때도, 같은 눈빛을 느낀 적이 있다. 처음 경계로 잔뜩 날이 선 눈빛이 마음을 열고 맑게 돌아서던 순간. 그 순도 백 프로 신뢰를 담은 눈빛. 그리고 헤어져야 하는 순간.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망감을 안은 채 전보다 훨씬 차갑게 굳어 버리던 눈빛.
아직도 그 아이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심장이 도려나가는 아픔과 죄책감. 내 어릴 적 모습과 많이 겹쳐 보였다. 엄마와 아빠가 언제 싸울지 몰라서 늘 지뢰밭을 걷는 듯 조마조마했던 순간들. 내가 밝게 웃으면 상황이 나아질까 싶어서 일부러 밝게 미소 지었던 순간들. 엄마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갈 때면 이렇게 영영 버림받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던 순간들. 모든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부모가 있었는데. 보육원의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버렸거나, 미혼모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나는 구석에 숨어서 한참을 울었다. 나를 찾는 전화가 언니에게서 걸려올 때까지, 숨을 숙이고 어린 시절의 내가, 그리고 보육원의 아이들이, 또 다문화 가정 봉사에서 만난 아이들이 상처를 받지 않기를. 상처를 받더라도 굳은살이 배겨 더 단단해 지기를. 그래서 심지가 굳고 마음이 맑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나처럼 응어리를 품은 어른으로는 자라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