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건 무엇인가_인식론
이제 책상은 집어치웁시다. 책상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눈앞에 있는 사물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자고요. 좀 더 핵심에 있는 사실은 없을까요? 책상 같은 사물 말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사실이요. 그걸 알면 거기서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전에 확고부동한 사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이놈의 확고부동한 사실이 뭐길래 이러는 걸까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습니까. 확고부동한 사실의 조건을 살펴보면 그 조건에 맞는 사실들을 추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철학에는 ‘확고부동한 사실’을 칭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주 진중하고 유서 깊은 단어죠.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단어에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듣기만 해도 더부룩한 게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찾아내야만 하는 무언가’가 바로 진리가 가지는 이미지이죠. 형이상학, 존재, 이성과 같은 단어들처럼 진리도 너무 신화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진리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습니다. 제 목표는 철학의 신화를 걷어내고 취미로 즐길 수 있게 하는 거니까요. 진리라는 게 사실 별거 없습니다. 확고부동한 사실이 진리입니다.
어떤 사실이 확고부동해지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그냥 사실과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겠죠? 이제 그 조건을 살펴봅시다.
먼저 필요한 건 ‘절대성’입니다. 절대성이라 하면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함’을 뜻합니다. 어떤 사실을 발견했는데 ‘단 섭씨 28도 이상에서만 사실임’이라고 하면 확고부동하다 할 수 없습니다.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면 조건이 붙어서는 안 되죠.
그다음 필요한 건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실을 발견했는데 내 친구가 반박할 수 있다면 그건 보편성을 충족하지 못한 겁니다. 확고부동한 사실이 고작 제 친구에 의해 반박되면 안 되겠죠.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불변성’입니다. 불변성이란 ‘시간과 공간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제는 맞았던 사실이 오늘은 달라진다면, 지구에서는 사실인 게 화성에서는 아니라면 그건 확고부동하다 할 수 없습니다.
인성이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책상의 색에 대해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귀납과 연역을 통해서요. 그러나 인성이의 귀납은 절대성과 불변성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모아놓았더라도 그 모든 데이터는 각자의 조건 아래에서만 맞는 데이터입니다. 조건이 붙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성을 충족하지 못한 거죠. 또한 오늘 본 데이터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었으므로 ‘불변성’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인성이의 연역은 ‘보편성’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참인 명제들은 결국 각자에게만 참이었다는 게 문제였죠. ‘책상에는 정령이 깃들어있다.’는 명제에 완벽하게 반박할 수 없다면 그 자체로 보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절대성. 보편성. 불변성. 이 세 가지를 충족할 수 있는 사실이 있을까요? 지금부터 우리가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확고부동한 사실들의 후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후보입니다. 이 녀석들이라면 무언가 해낼 거예요. 확고부동한 사실의 후보들 나와주세요.
첫 번째 후보선수입니다. 이 친구 아주 강력한 후보이죠. 1+1=2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90도다, a제곱+b제곱=c제곱이다 등등. 바로 수학적 사실입니다. 저의 수학 지식이 짧은 관계로 이런 유아적인 예시 밖에 못 드는 점 양해 바랍니다. 수학만큼 완전무결해 보이는 학문은 없습니다. 수와 그 사이의 법칙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이 완벽해 보이죠.
수학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듯 보입니다. 1+1=2에 조건은 없습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지도 않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수학이 자기 동일성의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만 간단합니다. ‘흰 분필은 백묵이다.’는 참입니다. 왜냐하면 흰 분필이 백묵이기 때문이죠. 사실상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기에 거짓이 될 수가 없습니다. 1+1=2도 그렇습니다. 1+1은 2입니다. 왜냐하면 1+1이 2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흰 분필은 백묵이다.’와 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명제는 가치가 없는 명제입니다. 결론을 이끌어내는 전제로서의 역할을 못하기에 그렇죠. 하지만 수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은 자기 동일적인 명제들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나 완벽해 보이는 수학이 한 정리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정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 불완전성 정리: 모든 무모순적 형식체계에는 그 체계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
제2 불완전성 정리: 모든 무모순적 형식체계는 그 체계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천천히 살펴보죠. ‘무모순적 형식체계’는 수학을 의미합니다. 즉 1번 정리는 수학 내에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있다는 의미입니다. 2번 정리는 더 가관입니다. 무모순성이란 확고부동함을 의미합니다. 즉 수학은 스스로 자신이 확고부동함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쉬운 말로 다시 정리해 보죠.
제1 불완전성 정리: 모든 수학은 그 안에서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
제2 불완전성 정리: 모든 수학은 그 확고부동함을 증명할 수 없다.
뭔가 엄청난 정리를 툭하고 내놓으니 신뢰가 떨어지는 느낌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리는 괴델이라는 수학자가 내놓은 불완전성 정리입니다. 저는 핵심만 간추려서 말했지만 그 뒤에는 복잡하고 정교한 수학 이론이 숨겨져 있죠. 그러니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괴델 이후의 수학계는 충격에 빠집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완전무결 해보이는 수학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거든요. 이제 수학적 사실은 더 이상 확고부동한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두 번째 후보선수를 만나보시죠. 이 친구도 만만치 않은 친구입니다. F=ma이다. 빛의 속도는 불변한다 등등. 과학적 사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만큼 영향력 있는 학문은 없습니다. 어떤 명제든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라는 말이 붙으면 확고부동한 사실이 되죠.
과학이 강력한 이유는 지극히 보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가장 잘하는 건 세 가지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사실들을 제거하는 겁니다. 최대한 까다로운 조건 속에서 테스트하고, 모두가 동의하지 못하면 끝없이 반박하며, 시공간 변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하거든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학적 사실들은 그런 과정을 통과한 겁니다.
그런 엄밀함이 가능한 건 과학이 귀납과 연역을 모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핵심은 실험과 관찰, 그리고 수학입니다. 실험과 관찰은 귀납적이고 수학은 연역적이죠.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 데이터를 걸러내니 엄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험을 통해 먼저 증명이 돼도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사실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수학이 먼저 증명해도 과학자들은 직접 그 사실을 관찰하기 위해 애씁니다. 두 가지 모두 충족되어야만 확고부동한 사실로 인정받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 과학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믿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입니다. 첫 번째 세계와 세계에 놓여있는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믿음입니다. 과학이 무언가를 보았다면 그건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원자도, 중력파도 미토콘드리아도 모두 말이죠.
두 번째 믿음은 이 세계가 원인과 결과로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공이 앞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가 공을 쳤기 때문입니다. 공을 친다면 공은 반드시 어딘가로 움직일 겁니다. 어떠한 사건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는 과정이 바로 과학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처럼 보이죠.
그러나 이 두 믿음은 과학이 너무 작은 세계를 보려고 하면서 무너집니다. 과학은 정말 정말 작은 것까지 보고 싶었어요. 광자보다도 더 작은 것을요. 그 작은 것을 한번 봐봅시다. 본다는 건 무엇인가요. 광자가 사물에 닿아 튕겨져 나와야만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게 광자보다 더 작다는 겁니다. 광자가 닿자마자 그 작은 게 움직여버립니다. 이런, 어디가 버렸지? 하고 다시 찾아보려 하면 광자가 그 작은 것을 또 움직이게 합니다.
이건 많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거기에 있는 사물을(원인) 관찰하여 사실을 밝혔습니다(결과). 그런데 아주 작은 것을 볼 때는 반대입니다. 우리의 본다라는 행위(결과)가 사물이 어디에 있을지(원인)를 결정해 버렸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시작을 알린 하이델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과학의 기본 믿음 두 가지가 흔들렸습니다. 사물이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보기에 사물이 거기 있다는 건 원인과 결과가 뒤바꼈음을 의미하니까요. 이건 과학의 절대성과 보편성, 불변성까지 모두 흔드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후보선수를 만나보겠습니다. 이번 후보는 아주 유서 깊은 선수입니다. 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 등등. 신학적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신의 말씀이죠.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다. 거기에 동양의 종교는 서양의 종교와 그 성향이 완전히 다르죠. 하지만 저는 지금 서양철학을 중심으로 쓰는 중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할 종교는 서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야훼, 알라로 불리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 들이요.
확고부동한 사실을 말하면서 신을 배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확고부동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동시에 신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면서 사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면 본질이 어디에 있으며 왜 생겼을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답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우리는 신과 만나게 됩니다. 모든 세계의 시작이자 원리. 모든 인간의 아버지.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창조한 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자로서의 신 말이에요. 결국 ‘확고부동한 사실=신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절대적인지 보편적인지 불변하는지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죠.
유일신으로서의 하나님 야훼의 말씀은 성경, 그중에서도 구약에 적혀 있습니다. 대략 BC 1500년에 쓰였다고 알려졌으며 그 내용에 따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받아 적은 것으로 나오죠. 그 구약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 기독교, 천주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근간이 되는 성서입니다. 이 네 종교는 모두 하나님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따릅니다. 네 종교가 차이는 이후에 등장한 예수님과 무함마드로부터 입니다.
이런 하나님 야훼와 예수님, 그리고 무함마드의 말씀은 확고부동한 사실로서 서양사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제거 대상입니다. 서로 믿는 말씀이 다르다면 전쟁입니다. 모든 학문 역시 그의 말씀과 그가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던 신의 말씀은 현대에 와서야 조금씩 무너집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함께 종교가 확고부동한 사실의 강력한 후보인지 의심받게 되죠. 여기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곧 나올 철학사에서 어떻게 신의 말씀이 흔들리고 무너지게 되었는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확고부동한 사실의 세 후보를 만나보았습니다. 세 후보 모두 어딘가 모자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강력한 녀석들입니다. 제 아무리 관념이 날뛴다고 해도 우리는 수학과 과학과 신학이 떠받치는 세계에서 확고부동한 사실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후보가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이렇게 문제가 많은 걸 보니 확고부동한 사실은 없구나라고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