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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Oct 22. 2023

나는 왜 알고 있지?

안다는 건 무엇인가_인식론

지금까지 우리는 확고부동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한 여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정을 위해 인성이가 어떻게 책상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실을 알아내려 했는지 살펴보았죠. 인성이는 열심히 보았고,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고 실제로 무엇을 보는 건지 의심도 해보았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아가고, 어디까지 알 수 있으며 진짜로 알고는 있는 건지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인성이가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책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책상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것. 책상이 한 개 있다는 것. 저 책상을 발로 차면 발가락이 몹시 아플 거라는 것 등등. 모두 인성이가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인성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누가 알려준 걸까요? 아니면 경험을 통해 배운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 채로 태어난 걸까요?


이미 알고 있는 것

세 살배기 아이를 관찰해 봅시다. 아이가 뒤뚱뒤뚱 걷다가 넘어집니다. 눈앞에는 엄마가 있군요. 아이는 ‘지금’ ‘내 앞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울기 시작합니다. 응애! 생각해 보면 신기합니다. ‘지금’은 시간이고, ‘내 앞에’는 공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사물이 세계에 놓여있는 방식이죠. 세 살배기 아이가 취미철학의 존재론 파트를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엄마가 어떻게 세계에 놓여있지 알고 있는 겁니다. 

아이는 왜 울었을까요. 자신이 울면 엄마가 와서 자신을 안아줄 걸 알기 때문입니다. ‘운다’라는 원인으로 ‘안아준다’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셈이죠. 이것도 신기하지 않습니까? 울면 안아줄 거란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세 살배기 아이가 이미 알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줘서 달래 봅시다. 왼손에는 두 개의 사탕이, 오른손에는 한 개의 사탕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어느 걸 고를지 선택하게 해 봅시다. 세 살배기 아이가 수의 의미까지 알고 있을까요? 사탕을 보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개의 사탕을 고릅니다. 아이는 하나보다 둘이 더 많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습니다.

언제(시간) 어디에(공간) 있는지, 몇 개(양)나 있는지, 상태가 괜찮은 건지(질), 이게 여기 왜 있는 건지(양태), 여기 있는 게 괜찮은 건지(관계). 우리가 사물을 보자마자 바로 알 수 있고 궁금해하는 점들입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 들이죠. 우리는 이 여섯 가지를 기준으로 세계와 사물을 이해합니다. 모든 인식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죠.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여기엔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장

첫 번째 주장은 그것마저도 경험으로 얻은 것이라는 겁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인간은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만 있을 뿐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다 응애! 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경험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경험을 쌓아가고 점차 세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죠. 

이 주장은 전 장에서 연역을 괴롭힌 방식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도, 내일 아침 태양이 뜰 거라는 사실도, 1+1=2라는 사실도 모두 경험을 통해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어디에 언제 있는 건지, 왜 있고 몇 개나 있는 건지 역시 경험이 없다면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건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떨까요. 우선 사물은 실제로 세계에 놓여있는 게 맞습니다. 우리는 그걸 실제로 보는 것이고요. 눈앞의 책상은 실제로 있습니다. 원자도, 전자기력도 모두 실제로 있습니다.  인성이는 그 책상을, 원자를, 전자기력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은 그 두 가지가 사실이어야만 가능합니다.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이 어디에 언제 있느지조차 알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들립니다 그럴 수밖에요. 우리들 대부분은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믿음 아래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13장에서 말한 관념이 사실이라 해도 그건 책상의 실제 모습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우리는 서로 책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어요.


문제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있는 것들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질문들을 합니다. 우리는 책상을 보며 “책상이 실제로 있다는 건 뭐지?” 라든지 “나는 왜 책상이 어디에 언제 있는지 알고 있지?” “책상의 본질은 뭐고 그건 누가 만든 거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1장에서 말했던 철학적 질문들이요. 나는 누구지? 세계란 뭐지? 나와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되지? 에 대한 현실너머의 질문들 말이에요.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안의 세계만 인식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 너머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들은 도대체 뭘 경험했길래 던질 수 있는 겁니까? 경험한 적도 없는 걸 궁금해하는 건 이상한 일 아닌가요?


두 번째 주장

두 번째 주장입니다.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능력이라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숨 쉬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숨을 쉽니다. 우리는 밥 먹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어머니의 젖을 잘 먹고 소화시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능력은 배우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폰으로 생각해 보죠. 아이폰은 어떻게 방대한 네트세계를 담나요? 그건 ios라는 운영체제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ios가 있기에 모든 인터넷 활동과 어플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ios가 없다면 아이폰은 어떤 것도 하지 못합니다. ios 없는 아이폰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ios는 아이폰의 모든 것입니다. 그 둘은 때려야 땔 수 없는 한 몸이죠.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ios와 같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지 경험으로 얻는 게 아닙니다. 그게 있어야만 인간인 거죠. 인간에겐 사물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몇 개나 있는지, 왜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운영체제가 있고 그걸 통해 세계를 인식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떨까요. 사물이 실제로 세계에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운영체제를 통해 보이는 사물입니다. 운영체제 너머에 있는 사물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죠. ios 너머에 있는 이모티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요? 1과 0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아이폰을 통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책상이 원자와 전자기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0과 1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운영체제가 책상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이러면 첫 번째 주장에서 나온 문제도 해결됩니다. 우리는 왜 경험 너머의 것들을 궁금해할까요? 우리의 운영체제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우리 안에 설치되어 있는 운영체제가 그런 걸 궁금해하는데 어떡하겠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계를 더 잘 인식하려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경험 너머의 것들을 궁금해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세계에 대해 더욱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있다는 건 뭔가?’ ‘안다는 건 뭔가?’라는 경험 너머의 질문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세계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문제

이러한 주장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가 있나요? 인간의 뇌를 열어 해부라도 해봤답니까? 아니면 개발자를 찾아가서 무슨 얘기라도 들었답니까.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말은 그럴싸합니다. 하지만 그게 맞는지 틀린 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게 맞고 틀리고를 생각할 수 있는 건가요.

거기다가 사물이 세계에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하는 건 꽤나 과격하게 들립니다. 그건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실제 세계를 부정하는 겁니다. 만약 눈앞에 실제 사물이 있는지 모른다면 저는 어떻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뭘 믿고 제가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겠습니까. 존재론에서 열심히 있음에 대해 말하였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떠든 셈이 됩니다. 우리의 빛나는 학문과 기술은 모두 사물이 실제로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해낸 것들입니다.

뭐에 대해 안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 줄이야요.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진짜로 보고는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있기는 한건지조차 의심이 됩니다.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한 것들도 문제가 있었고요. 애초에 우리는 왜 알고 있는 건지 조차도 알 수가 없으니 참 큰일입니다. 



여기까지가 ‘있다’와 안다’에 대한 저글링이었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도 많죠? 그럼에도 철학이 나름의 답을 내려주는 게 저는 신기합니다.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 전개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쓸대도 없고 답도 없어 보이는 질문에 나름 그럴싸한 답을 찾아줍니다. 그리곤 자기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며 이 답이 아니야!’라고 외칩니다. 그럼 또 그 문제를 극복하고자 다른 답을 찾습니다. 그 답에 흡족해하다가 또 다른 문제를 찾아내요. 그리고 또 더 나은 답을 찾아 헤맵니다. 이게 바로 철학이 하는 일이고 개념을 저글링 하는 과정입니다. 철학이 재밌는 이유기 바로 이거죠.

참 많은 질문을 했고 많은 답도 보았습니다. 그 답이 가진 문제도 빠지지 않고 보았고요. 이제 궁금하지 않나요? 도대체 철학자들은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제 실제로 철학자들이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을 찾아 어떻게 문제를 극복했는지 알아볼 시간입니다. 철학사입니다. 철학의 천재들이 한 있음과 앎에 대한 저글링을 구경하러 가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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