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편]임신해도 다 할 수 있다 했지만 안 한 것들
임신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봤다고 했지만
물론 나도 노심초사하며 별의별 걱정을 다 하던 시기가 있었다.
수정 후 2주는 배자발생기로
All or nothing
즉, 죽거나 아무 영향이 없는 시기다.
수정 후 3주에서 8주는 장기형성기, 배아 형성기라고 해서 주요 장기의 기형이 유발될 수 있는 시기다.
(이후 수정 9주부터는 태아 성장기로 문제 시 성장지연이나 기능 부전이 될 수 있으며 생식기나 신경계는 여전히 기형발생이 가능하긴 하다.)
문제는 바로 저 장기 형성기, 수정 후 3에서 8주다. 이 시기에 내가 잘못하면 우리 아기는 끝이다라는 생각에 이 때는 초 예민 상태였던 것 같다.
평소 무던하고
뭐 그럴 수도 있지
라는 말을 자주 하고
태평했던 나는 저 시기만큼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시기에는 나는 이렇게까지 해봤다.
1. 유해 물질은 모두 피하자.
일단 화장을 하지 않았다. 선크림도 안 바르고 콘택트렌즈도 끼지 않고 립스틱도 안 바르고 다녔다. 미세플라스틱이 영향을 준다는 어느 논문을 보고서는 최대한 쌩얼로 다녔다.
물론 피부로 흡수되는 것은 거의 없겠고 태아한테 어떤 물질을 주기 전 나의 간에서 알아서 잘 해독을 한 뒤 전해주겠지만 그냥 내 마음이 찝찝했다.
2. 먹는 것은 (먹어도) 조심 또 조심
입덧 시기에는 고기가 정말 입에 안 들어갔다. 오로지 면만 끌렸다.
냉면 파스타 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면치기를 하고 다녔다.
컵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데 또 미세플라스틱이니 환경호르몬이니 다 걱정이 되어서 컵라면은 냄비에 끓여 먹었다.
일 하다가, 당직 시간에 컵라면이 먹고 싶을 때는 냄비에 끓일 수가 없어서 유리그릇에 뜨거운 물을 넣고 조리해서 먹었다.
마음 같아서는 라면도 먹으면 안 되지만 호르몬의 노예가 되었는지 도저히 라면을 먹지 않고서는 그날 밤을 넘길 수가 없는 시한부 환자가 된 것 같았다.
3. 입덧 약도 먹지 않았다.
임신 기간 내내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입덧이었다. 임신 후반기에 소화가 좀 안되어도 "그래도 입덧보다는 낫지"
속이 쓰려도
"입덧은 훨씬 괴로웠지"
라고 안도하게 해주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소화가 좀 안되거나 속 쓰린 것은 좀만 참으면 괜찮아진다.
그런데 입덧은 좀만 참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시작되어 밤에 눈 감기 전까지 느글느글거리는 느낌이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디클렉틴이라는 약이 있다고 했다. 입덧약이란다.
안전하단다. 임상시험 통과했고 많이들 처방해 먹는다.
하지만 나는 입덧약을 먹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입덧은 생리적 현상이라고 배웠다. 느글느글하기만 할 뿐 먹는 것도 잘 먹고, 내가 막상 토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고 아기도 잘 자라고 있었다.
입덧은 저 옛날 임신테스트기가 발명되기 전에 임신했다고 선조들에게 알려주는 일종의 생리적 현상 아니었을까(나의 가설일 뿐이다).
치료 대상은 임신 오조다. 임신 오조는 병리적 현상으로 하루 종일 토한다. 토를 계속해서 탈수와 전해질 이상이 발생하고 아기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수액과 약물 치료가 꼭 필요한 병리적 현상이다.
내가 앓고 있는 증상은 임신 오조가 아니고 입덧이기에 그냥 참아 보았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니까 입덧이 사라졌다.
지나고 보니
저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고
호르몬의 영향인지
내가 반쯤은 미쳤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라 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다 부질없던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육아에 지칠 때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맞아, 그때는 그렇게까지 했었네. 에구, 그 마음 잘 가지고 아기에게 좀 더 잘해줘야지."라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