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피아노 학원에서 둘째의 연주회가 있었다. 1년에 딱 한 번 열리는 이 행사는 아이들이 그간 갈고닦은 피아노 실력을 선보이는 자리여서 꽤나 의미가 깊었다. 연주회 날은 플래카드가 걸리고 부모님들이 초대된다. 연주회 날짜가 다가오면 매 주말마다 집합해 리허설까지 하는 통에 마치 콩쿠르에라도 나가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둘째보다 먼저 피아노를 시작한 큰 딸은 연주회 때마다 걱정이 많았다. 매사 꼼꼼하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많던 그녀는 집에서도 수시로 피아노를 찾았다. 그 덕에 연주회 즈음이면 나도 귀 호강을 하곤 했다. 청소기를 돌리는 사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사이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체르니 40번을 향해 가던 아이의 피아노 선율은 멋모르는 내가 듣기에도 훌륭했다.
국민학교 시절 짝꿍 집에 놀러 갔더니 거대한 피아노가 있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났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친구는 내게 피아노 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여러 곡에 도전한 끝에 우리는 '고양이 행진곡'을 선택했다. 난 악보 보는 법은 몰랐지만 곧 외워서 그 곡을 다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많이 연습하고 놀았던지 지금도 이 곡은 내게 식은 죽 먹기다. 지금 큰딸아이는 내가 어린 시절 그렇게 부러워했던 친구보다도 피아노 솜씨가 훌륭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둘째는 연주회 날짜가 다가와도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았다. 난 걱정스런 마음으로 물었다.
“땡땡 아 이제 곧 연주회인데 연습 안 해도 돼?”
“응. 학원에서 맨날 연습해서 괜찮아.”
“그래도 엄마 궁금하니까 한 번 들려줘.”
“응 알았어.”
아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피아노로 돌진했다. 둥둥둥 쾅 두두둥.. 생각보다 꽤 어려워 보이는 곡이었다.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손도 조막만 한 아이가 이리저리 손을 뻗어 연주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한편 몇 번이나 틀려도 상관하지 않고 건반을 꽝꽝 내리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녀는 연주회에 대한 걱정과 긴장은 저 우주 멀리 내다 버린 것 같았다.
“우와 우리 땡땡이 너무 잘하네. 2년 동안 피아노 학원에 놀러 다닌 줄만 알았더니 열심히 했구나!”
”당연하지. 나 요즘 연습하느라 손가락까지 아팠어 엄마.”
연주회 당일이 되어 남편과 나는 꽃다발을 사들고 연주회 장소로 향했다. 연분홍 안개꽃이 노랑, 핑크 카네이션을 곱게 감싼 꽃다발에서 싱그러운 봄향기가 났다. 오랜만에 꽃을 봐서 그런지 아이 연주회에 갈 생각 때문인지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연주회장에는 이미 도착한 부모님들이 자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겨우 자리를 찾아 아이를 기다렸다.
첫 번째 아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둘째 딸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배꼽 인사를 마친 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열심히 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두 번째 세 번째.. 아직 저학년인 아이들의 연주는 실수도 많고 서툴렀지만 우린 그럴수록 더 아이들을 응원하게 됐다. 하나의 성취를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아이들의 정성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딸아이의 연주가 시작됐다. 연주회라 빨간 원피스에 타이즈, 고양이 머리까지 하고 간 아이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아이는 집에서 쳤던 것보다 더 잘 해냈다.
이어 점점 큰 아이들이 나와 연주회 실력을 뽐냈다. 저학년 아이들의 곡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들었지만, 난 점점 감상하는 사람이 되었다. 때론 애잔하고 때론 강렬한 피아노 선율에 마음이 찌릿찌릿했다. 워털루 전쟁이라는 곡을 소화한 6학년 학생의 연주를 들을 땐 정말 공연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피아노 선율에 맞춰 감정을 달리하며 미끄러지듯 몸을 움직였다. 음악에 푹 빠진 그의 모습이 내 고개와 발도 까딱까딱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학생 역시 엄청난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의 실수 후 건반 위에 고개를 묻었다. 속상한 그녀의 마음이 너무 짙게 느껴져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주회 때마다 실수할까 맘 졸이던 큰딸 생각이 나기도 했다. 부디 오늘을 위해 지금까지 애쓴 그녀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선생님의 격려와 부모님들의 박수로 아이는 다시 힘을 냈으나 이미 무너진 멘털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연주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연주한 아이들이 모두 나와 합창을 했다. 둘째 딸이 집에서 계속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큰딸의 반주에 맞춰 아이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은 몇 달간 고생한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둘째 딸의 차례가 되자, 선생님이 말했다.
“땡땡 아 이게 무슨 머리야? 토끼 머리인가? 너무 귀엽다.”
“고양이 머리예요.”
”고양이구나. 우리 땡땡이 오늘 정말 잘했어요. 빨간 드레스도 정말 이쁘네!”
칭찬을 한가득 받은 아이는 기분이 좋았던지 대답 대신 “냐~~ 옹” 하고 고양이 소리를 냈다. 나는 느닷없는 아이의 고양이 변신에 깜짝 놀랐고 그 자리에 있던 부모님들은 깔깔 웃었다. 연주회가 끝나기 무섭게 아이는 친구와 손을 잡고 놀이터로 뛰어갔다. 아주 홀가분한 표정으로.
생각지도 못하게 고양이로 마무리된 아이의 피아노 연주회. 오늘은 내가 어릴 적 배웠던 고양이 행진곡과 함께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