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바다를 들려줄게 11
“그 언덕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내가 다그쳤다. 아내가 옆에서 다그치는데도 상관없다는 듯 여우는 정신없이 아내와 아이의 몸을 살폈다. 여우는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여우는 그때처럼 목 놓아 울었다. 아주 길게…. 아내는 여우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한참을 울고 난 여우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 얘기를 들어줄래요? 내 엄마와 가장 소중한 친구에 관한 이야기예요.”
아내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의 이야기는 길고 슬펐다. 아내와 아이는 여우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얘기가 다 끝났을 때 셋은 같이 울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을 아이가 깼다.
“아빠, 민들레를 만나러 가요.”
“그래”
여우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준 가족이, 그렇게 말해준 아이를 가진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셋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출발했다. 여우는 생각했다. 해를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바다를 향했던 길처럼 길고 외롭지 않다고.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아직 민들레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를 말이다.
‘그 겨울을 무사히 보내지 못했을지 몰라. 아니면 나를 기다리다 지쳐 시들었으면 어쩌지!’
여우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민들레와 같이 한 마지막 약속을 떠올렸다. 봄에 만나기로 했던 그 약속 말이다. 그 생각만 하고 가족들과 앞으로 달렸다.
며칠을 달린 후에야 멀리서 그 언덕이 보였다. 여우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뛰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가족들과 같이 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 나무와 민들레가 보일 것이다. 아니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여우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여우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파랗기만 하던 들판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눈이 아플 만큼 선명한 노란색. 온 천지에 민들레가 있었다. 여우가 그 민들레밭에 발을 들어놓았을 때 사방의 민들레가 꽃을 흔들며 여우를 반겨 주었다. 민들레들은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온몸으로 여우를 맞이했다. 황금빛 민들레꽃 사이를 걸으며 여우는 반가움과 두려움으로 몸이 떨렸다. 천천히 걸어 그 나무 아래까지 갔다. 엄마가 누워있던 그 자리.
“엄마, 내가 돌아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여우는 눈을 꼭 감고 뒤를 돌았다.
여우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들리는 그 목소리. 여우를 어둠 속에서 끌어내 준 그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안녕”
여우는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민들레가 거기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여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으로 변한 이파리가 겹겹이 쌓여 시들어 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 작고 시들어 말라붙은 꽃이 홀씨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내게 해줄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바다 얘기도 말이야.”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작고 지친 목소리였지만 여우는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여우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사이도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어느새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한번 터져 나온 흐느낌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커졌다. 그 울음소리가 슬프면서도 기쁘게 들렸다. 여우는 이제야 온전한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후 마침내 여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너는 없었다면 난 그날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정말 고마워. 꼭 얘기해주고 싶었어."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훅 불어왔다. 그 바람이 씨를 가득 담고 있던 민들레꽃을 흔들어 홀씨를 바람에 태웠다. 작은 산들바람이었는데 바람이 민들레 홀씨를 하늘 높이 올려다 놓았다. 하늘 높이 올라간 홀씨는 다시 강한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 높이 날아갔다. 홀씨는 새가 된 것같이 자유롭게 날아갔다. 홀씨가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기 노란 민들레밭이 보였다. 꽃에 달려 있을 때는 아주 넓다고 생각했는데 하늘 위에서 보니 손바닥만 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밭 뒤로는 숲이 있고, 숲 너머에 파란 무언가가 보였다. 민들레 홀씨는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여우가 다녀왔던 그 바다로 민들레 홀씨도 가고 있었다.
여우와 민들레는 바람에 날리는 홀씨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드디어 여우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바다를 들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