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세이어즈
‘도로시 세이어즈’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C.S. 루이스('나니아 연대기), J.R.R. 톨킨('반지의 제왕'), 그리고 시인 T.S. 엘리엇의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바로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며 그들과 교류했던 인물이다.
또한, 애거서 크리스티, G.K. 체스터턴 같은 당대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들과 함께 추리소설 클럽을 만든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는 단순히 소설가에 그치지 않고,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으로 인정받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작가였다.
그런 그녀가 1947년 여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열린 교육 관련 강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강연 제목은 바로 "The Lost Tools of Learning" (잃어버린 배움의 도구)이다.
강연의 포문은 시대를 초월하는 어른들의 단골 푸념과 닮아 있었다. 세이어즈는 당시 영국의 교육 현실을 매섭게 비판했다. 학생들은 엄청나게 많은 과목 지식을 머릿속에 쓸어 담지만, 정작 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치 지식의 '쓰레기 하치장'처럼 정보만 가득할 뿐, 그 정보들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는 지적이다.
그녀는 청중들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읽고 쓰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 왜 사람들은 광고나 선전에 이리 쉽게 휘둘리는가?"
"왜 요즘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을 스스로 배우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가?"
왠지 요즘 문해력에 대해 논하며 나오고 있는 비판 지점과 비슷한지 않는가? 지식인들은 100년전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세이어스가 제시한 해결책은 바로 중세 시대의 고전 교육 방식인 '삼학 (트리비움(Trivium))'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법(Grammar), 논리(Logic), 수사학(Rhetoric)이라는 전통적인 삼학을 새롭게 해석했다. 세이어스는 이 세 가지가 단순히 배워야 할 '과목'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든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자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맞춘 '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녀가 이야기한 삼학의 세 단계는 이러하다.
1. 문법 단계 (앵무새 시기 Poll-parrot Stage): 대략 4세에서 11세 사이의 시기이다. 이때 아이들은 마치 앵무새처럼 정보를 놀라운 속도로 흡수하고 암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사실, 이름, 연대, 규칙, 구구단 등 외우는 것을 재미있어 한다. 이 시기에는 각 분야의 기본적인 '문법', 즉 사실과 기초 지식을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 논리 단계 (건방진 시기 Pert Stage):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인 12세부터 16세까지의 시기이다. 이때 아이들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따지고, 반박하기를 좋아한다. "왜요?" "정말 그래?"같이 '따지고 드는' 성향을 교육에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주장의 오류를 찾아내고, 타당하게 논증하는 방법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이다. 사춘기의 반항심을 배움의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3. 수사학 단계 (시인의 시기 Poetic Stage): 16세 이후, 이제 논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남을 설득하는 능력을 기르는 시기이다. 글쓰기, 말하기, 토론 등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법을 익히는 단계이다.
세이어스는 이 세 단계를 충실히 거친 사람은 어떤 새로운 지식과 마주하더라도 스스로 학습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칠 수 있는 '진짜 배우는 사람'이 된다고 역설했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렇다면 세이어스는 자신의 이런 이상적인 교육 방법이 현실에서 실제로 구현될 거라고 굳게 믿었을까? 그녀의 강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This prospect need arouse neither hope nor alarm. It is in the highest degree improbable that the reforms I propose will ever be carried into effect.
이 가능성은 희망을 불러일으킬 필요도, 두려움을 일으킬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개혁이 실제로 시행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제안이 당시의 거대한 교육 시스템 속에서 곧바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굳어진 방식, 복잡한 교육계의 현실을 그녀 또한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강연이 그저 '이루어지기 힘든 이상'으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녀는 교육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그 해결책으로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키우는 고전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비록 주류 교육계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며 잊혀졌지만, 그녀의 통찰력 있는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울려 퍼졌다.
세이어스의 강연은 발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후 특히 미국에서 '고전 교육 부흥 운동'의 불씨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실제로 현실로 이끈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미국의 더글러스 윌슨(Douglas Wilson) 목사이다. 그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은 세이어스의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전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를 세우고 관련 저술을 하면서, '잃어버린 배움의 도구'를 다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 고전 학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로고스 스쿨(Logos School)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