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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Jun 30. 2024

기계가 이상해

1.옷 말고 제발 다른 거!

"여보, 이번 결혼기념일엔 제발 옷 말고 다른 걸로 해줘

작년 결혼기념일 때 내가 한 말이었다. 매년 받는 원피스, 블라우스, 스카프로 옷장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결혼 초기엔 달랐다. 첫 기념일 때 받은 고급진 명품백을 아직도 기억한다. 남편 월급의 절반은 될 법한 가격. 그다음 해엔 또 해외서 공수한 비싼 가방이었다. 속으론 좋았지만 남편에게 한 소리 했다.

"여보, 이렇게 비싼 걸 사면 어떡해. 애들 키우려면 악착같이 모아야지."

그랬다. 남편은 내 말을 찰떡같이 듣기 시작했다. 남편의 선물이 점점 '현실적'으로 변하더니 주구장창 옷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남편 센스가 괜찮다고 칭찬도 해줬고 좋은 브랜드를 기가 막히게 잘 골라서 싸게 사는 남편이 지혜로워 보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사소한 것이 왜 나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일까. 올해는 진짜 뭔가 다르길 바랐다. 뭐든 좋으니 옷만 아니길.

‘설마... 올해도?‘

눈동자를 옆으로 획 돌려서 남편을 째려봤다. 남편도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아니, 이번엔 달라."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며칠 뒤, 택배 아저씨가 왔다. 남편이 후다닥 뛰어나가 받았다. 내 호기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뭐야, 보여줘!"

"안돼, 아직 때가 아니야."

내 머리는 쉼 없이 굴러갔다.

향수? 시계? 아님 음식물 처리기? 다이아? 는 아닐 거고.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나를 보니 웃음이 났다. 이렇게 설레는 건 몇 년 만일까. 남편의 선물 변천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보이는 것 같았다. 화려했던 시작, 현실의 무게, 그리고 이제는. 뭐가 남았을까? 안정? 권태기?



드디어 기념일 전날 밤. 남편이 수상쩍게 실눈을 뜨며 나를 보았다.

"내일 아침에 깜짝 놀랄 준비는 됐지?".

“그럼!”


드디어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마자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남편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무게가 꽤 나가는 걸 보니 옷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과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과연 결혼기념일 선물 자체의 문제였을까. 그때 난 뭔가 인생에서 확 바뀌는 지점을 느끼고 싶었다. 50이라는 나이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나이였고,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 없는 혼자만의 터널을 지나는 시작이었다.

삐죽 나온 흰머리처럼, 숨기려 해도 다시 돋아나 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질긴 싸움 같았다. 뽑아도 또 자라서 나를 휘감아 버릴 것 같은 그 느낌이 날 질리게 만들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편에게 언젠간 늙어갈 마누라의 모습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섬세한 변화를 일일이 설명하고 투정 부리기엔 변화되는 내 모습을 내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더 늦출 수 있다고, 되돌릴 수 있다고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으니까.

결국 애꿎은 남편의 선물을 타깃으로 잡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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