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루터를 따라서
그라나다에서 출발한 버스가 2시간이 지나자 푸에르토 라피세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한적한 시골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여행자들에게 여유를 느끼게 한다. 황톳빛 기와와 하얀 회벽의 집들이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마을에 소설 돈키호테에서 배경이 되었던 나오는 벤타 델 기호테 여관이 있다.
소설에서 중세의 성으로 착각을 했던 이곳에서 돈키호테는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해, 우물가 옆에서 밤새도록 그의 갑옷을 지켰다. 또한 여관집 주인을 성주로 생각해서 주인을 졸라 기사 작위를 받았다.
노벨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책인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는 이곳에 머무르며 소설을 탄생시켰다. 지금도 2층 박물관으로 가면 그가 사용했던 책상과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돈키호테의 구절을 새겨 넣은 타일 장식을 감상할 수 있다.
돈키호테의 여관을 나와 라만차 지방의 평원을 지나 다음 목적지인 콘수에그라로 이동한다.
스페인 중부의 라만차 지방은 매우 건조한 땅으로 한 때 유태인과 이슬람교인 등 이교도들이 많이 살아서 <더러운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이곳을 여행하는 돈키호테의 머리말 <돈>은 남자에 붙이는 존칭이고 <키호테>는 남자의 허벅지 보호대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남성의 심벌이 굉장히 흥분된 상태를 의미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주인공의 이름, 둘 다 매우 조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소설 돈키호테는 반 미치광이 늙은 기사를 통해 기독교 순혈주의에 빠져 마녀 사냥을 일상적으로 집행하던 당시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버스가 출발한 지 40분 만에 콘수에그라에 도착했다.
버스를 탄 채 마을 중심을 지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오르자 끝없이 펼쳐진 황토색 평원 위로 우뚝 솟은 10개의 하얀 풍차와 푸른 하늘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와 산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산초야 저길 좀 보아라. 서른 명도 넘는 흉악한 거인들이 서 있다. 주인님, 저것들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입니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돈키호테가 무장을 한 채 그의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달려드는 모습은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장면이다. 오늘날 셰익스피어와 함께 전 세계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다음과 같은 말한다.
불가능한 꿈을 꾸며 무적의 적수를 이기는 것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며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이 기사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콘수에그라를 떠난 지 1시간도 안되어 톨레도에 도착했다.
세르반테스가 스페인의 영광이요 빛이라고 극찬한 톨레도는 16세기까지 스페인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경제의 중심지였다. 기독교와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들이 함께 살았던 톨레도는 16세기 무어인들이 추방되면서 스페인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마드리드로 수도를 이전하자 톨레도는 발전을 멈추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가 1987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서 세계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되었다.
톨레도에 도착하여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언덕을 오르면 소코도베르 광장이 나타난다. 이 광장 한편에 있는
엘 트래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즐기자.
식당에서 추천하는 모둠 바비큐 세트는 소고기의 갖은 부위를 그릴에 구워 나오는 것으로 고소하면서 풍미가 넘친다. 여기에 시원한 생맥주를 더하면 장시간 버스 여행의 피로를 금세 풀어준다. 여유롭고 맛있는 점심식사를 마치자 비로소 톨레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아온다.
식당에서 나와 소코도베르 광장을 중심으로 톨레도 산책을 시작한다.
500년 전 열쇠를 그대로 사용하며 중세풍 옛집들이 들어서 있는 톨레도의 좁고 복잡한 길을 걷다 보면 대성당에 어느새 도착한다.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인 톨레도의 대성당은 한마디로 경이롭다. 밀라노의 두오모나 파리의 노트르담 등 다른 어느 도시의 대성당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톨레도 대성당은 1299년 스페인이 이슬람의 지배를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알폰소 8세가 세웠다.
톨레도 대성당으로 입장하면 화려한 황금 제단과 성가대석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가 여행자를 압도한다. 또한 고야와 벨라스케스 등 거장들이 남긴 명화와 거대한 성현채 시대는 감동을 넘어 놀라움을 선사한다.
톨레도 성당을 나와 맞은편에 보이는 시청사 옆의 골목으로 걸어가면 산타 토메 성당이 나온다.
산타 토메 성당을 방문하는 이유는 엘그래코의 명작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감상하기 위해서이다.
선행과 막대한 성당의 기부로 존경을 받았던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을 그린 이 작품은 작품 속 하단 오른쪽에 보이는 하연 옷의 신부가 엘 그레코에게 주문하여 1586년에 완성하였다. 신부 옆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노가 부축하여 안장하고 있는 오르가스 백작의 모습이 보인다. 그 주위에서 많은 명사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성 스테파노 옆에 보이는 소년은 엘그래코의 아들이다. 그는 선행과 믿음이 있어야 백작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
그림 상단에는 심판자인 예수님과 붉은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 그리고 낙타 가죽 옷을 두른 세례 요한이 보인다. 또한 성모 옆으로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성 베드로의 모습도 보인다. 성모의 아래에서 천사가 안고 있는 아기의 모습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백작의 영혼을 상징한다.
회색빛 명암과 색채 그리고 길쭉한 인체 묘사로 현실과 이상을 조합하여 작품을 완성한 앨 그레코는 1560년경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인이 되자 베네치아와 로마로 넘어와서 이탈리아 화풍의 그림을 배웠으며 1577년 스페인의 수도인 톨레도로 와서 궁중화가가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왕인 펠리페 2세의 눈에 들지 못하자 이곳에 정착하며 40년 동안 종교화와 인물화를 그리며 살았다.
그는 원근법을 기본으로 하는 사실주의 화풍을 무시하여 18세기까지 인정을 못 받았으나 19세기에 재평가가 이루어져 스페인 최고의 화가로 각광받았다. 그가 그린 대부분 종교화는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사물의 본질적인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산타 토메 성당을 나와 톨레도가 원조인 산토 토메 마자판 가게로 이동한다.
150년 전 수녀들이 시작하여 지금까지 영업을 이어온 가게는 겉은 부드럽고 안은 쫀득쫀득한 마자판을 판매한다. 계란 노른자에 아몬드 가루와 꿀을 반죽해 구워내는 마자판은 달고 고소해 커피와 함께 먹으면 좋다.
다시 소코도베르 광장으로 돌아와 미니 열차를 타고 톨레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향한다.
미니열차에서 내려 전망대에 서면 도시를 요새처럼 감싸는 타호강을 배경으로 톨레도 대성당과 알카사르 궁전이 창과 방패처럼 솟아 있는 환상적인 중세의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중세 물이 뚝뚝 떨어지는 톨레도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버스에 오르자 1시간이 조금 지나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마드리드 도심에 위치한 레티로 공원 옆에 있는 아이레 그란 콜론 호텔은 피곤한 몸을 쉬기에 최적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체크인을 하고 조금 쉬다 보니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 있어 호텔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카사노바에서 저녁 만찬을 즐긴다.
식당에 앉아 봉골레 스파게티와 크림 스파게티를 주문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깔끔하면서 감칠맛이 나는 봉골래 스파게티와 고소하면서 풍부한 크림 스파게티는 여행자의 입맛을 단번에 만족시킨다. 달콤하면서 끝 맛이 깨끗한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호텔로 돌아오니 꿀맛 같은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