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 하면 다 길이 있다"
첫 사회생활은 대기업에서 시작했다. 군기가 힘들고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회사지만, 글로벌 마켓을 진출해 활발히 비즈니스를 하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회사였다. 지금은 대학생들의 취업 희망 기업 순위가 조금 떨어졌던데, 당시는 최상위권을 앞다투던 회사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회사답게 거대한 조직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변화를 부르짖던 시기였던지라 겁먹었던 만큼 보수적인 생활만은 아니었다. 전 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은, 10년이 지난 지금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과 일을 바라보는 큰 관점, 짧은 시간 내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경험 등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줄곧 명확하게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다. '영화'업계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는데, 더 연차를 먹을수록 타 업계 이직이 어려울 것 같아 고민 끝에 대기업 첫 직장을 퇴사한 것이 4년 차, 나이 30 먹었을 때였다.
첫 직장, 첫 퇴사, 첫 이직의 경험이었기에 실로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특히나 잘 나가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영화일'을 한다고 하니 말리는 주변인이 열 명 중에 열이었다. 두 가지 일에 에너지를 함께 쏟는 게 어려웠던 나는, 이직할 회사를 정해두고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아침 7시 출근에 수시로 야근하는 회사를 '사원' 직급으로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쉽지도 않았고, 인맥이 없는 타 업계로 이직을 하는 것이었기에 준비할 것도 많을 것 같았다.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어보니 생각보다 심리적 부담은 엄청났다. 잘 나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제일 아쉬운 건 나, 본인이었다. '과연 포기한 것들만큼, 내가 얻는 것이 있을까.'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확실했다. 준비했던 계획들은 물거품이 되기 일수였고, 생각지 못한 변수들도 곳곳에서 도사렸다. '모두가 말리는 선택을 감행하더니,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 눈을 치켜뜨고 모두가 나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밖에서는 아닌 척 해도, 집에서는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실제로는 별 관심들 없었을 텐데 말이다.)
약 3개월 정도의 공백을 가진 뒤, 운 좋게도 딱 원하던 회사를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3개월은, 살면서 받아본 스트레스의 최고치를 감수해야 했던 기억이다. 나를 소개할만한 적절한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평생 놀 것도 아닌데, 원하는 방향으로 일들이 잘 풀리면 맘 편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남들은 나에게 훨씬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걱정해주겠지, 응원해주겠지 했던 사람들도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엔 상처도 받고, 속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참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많이도 참으며 살았구나.' 당시 이 시간은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고민의 순간이 올 때, 좀 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에만 집중하고 선택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선택을 주저했던 나 같은 사람에겐 필요했던 공백이었다.
첫 직장에서 워낙 높은 초봉을 받았었다. 입사 당시에는 주변 친구들에게 많은 부러움을 샀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많이 주는 만큼 회사를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라이프스타일을 세팅해야만 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그러기는 싫었고, 이왕이면 제일 잘하고 싶어 열심히 다녔다. 직무는 같았지만, 타 업계로 이직을 하다 보니 기존 연봉 수준을 고수하긴 힘들었다. 업계마다 연봉 테이블의 수준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업계에서는 이직하면서 내가 받은 연봉이 결코 낮지 않은 연봉이었을 테지만, 결국 첫 직장보다 반 가까이를 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생각은 그렇다. 높은 연봉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지속가능성'이다. 3~5년 단위로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상승시켜내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좋은 전략이다. 하지만, 연봉 1억을 받아도 근속연수를 1년밖에 채우지 못하면 내가 번 돈은 1억. 연봉 5천을 받아도 근속연수를 5년 채우면 내가 번 돈은 2.5억이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더 큰 연봉 상승률을 얻어낼 수도 있다. 즉, '1년에 얼마를 벌 수 있는가'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일의 즐거움, 업계의 성장 가능성, 내 가치와 역량의 성장 등 장기적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도 고민을 해봐야 한다. 물론 모든 선택의 기쁨과 고난은 본인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10년 차 때 나는, 대기업이었던 첫 직장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되었고, 그 대기업은 내가 퇴사한 이후 공교롭게도 사업이 주춤하며 꾸준히 연봉이 하락했다.
한 번 이직을 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경력직이 된다. 경력직이 된다는 것은 가끔 서럽다. 조직은 명확하게 기대하는 퍼포먼스가 있기 때문에 경력직을 뽑는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의 외로움 등을 견뎌내는 것도 이직을 하고 난 뒤 큰 숙제가 된다. 영화업계는 타 업계와 교류가 적고,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만큼 새로운 이력의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게대가 대기업에서 연봉까지 깎고 왔다니, '이건 또 어떤 병신인가.' 했다는 사람도 많았다고 나중에 들었다. 업계를 바꾼 이직이기에 초반에는 모르는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용어, 개념 등을 익히는 것은 몇 달이면 충분하다. 결국, 간사한 텃세를 부리며 시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며 회사생활을 한 사람들은 도태되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치를 가진 사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상은 천천히 순리대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직을 하고 거센 텃세가 있었고, '어차피 장기전'일 텐데 천천히 진정성 있는 관계를 넓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10년 차인 올해, 그 회사에서 가장 오래 다닌 직원 중에 한 명이 되었다.
첫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해도, 내가 원하는 업계에 무사히 진입해하고 싶었던 일을 할 기회만 가져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막상 들어가 일을 해보니 정말 재밌었다. 내가 가졌던 확신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불안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약이 되어주었다. 걱정 어린 조언과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과감히 선택하지 못했다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받았던 공백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전례 없는 흥행을 했던 영화, 세계인들이 모이는 국제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함께 밟게 해 준 영화, 전국을 센세이션 하게 만들었던 영화 등 원 없이 일을 즐겼다. 특진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니, 따라오는 보상과 생각지 못했던 이벤트들이 나의 삶을 채워주었다.
결론은 이렇다. 회사 하나를 그만둔다고 세상이 무너지거나, 내게 엄청한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 예측 가능한 삶의 궤도를 벗어남에서 오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인생에 그런 순간은 생각보다 수시로 찾아오더라.
기성세대가 해줄 수 있는 조언, 불안한 길을 걸어보지 않는 주변인들이 해줄 수 있는 조언 역시 정해져 있다. 본인이 명확히 원하는 것과 목표가 없을 경우, 선택의 이유를 '나'가 아닌 '타인'에서 찾게 되고, 돌아오는 결과에 대하여 남 탓을 하게 된다. 버티며 내 갈길을 묵묵히 갈 때 만나게 되는 행복, 기쁨, 슬픔, 고난은 모두가 내 것이다. 행복과 기쁨은 버틴 불안감에 대한 보상이고, 슬픔과 고난은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인생의 여정을 마주하는데 도움이 된다. 대기업이라는 가치가 주는 금적전 보상,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안정성 등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은 잘 다니면 된다. 대기업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고, 대기업 들어가서 버티며 오래 다니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대한민국은 굉장히 획일화된 사회,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격려가 없는 사회다. 안전해 보이는 도로와 거친 자갈밭 입구 중 어느 길을 선택할지, 어느 길이 본인에게 더 큰 만족감을 줄지는 개인에게 달렸다. 안전해 보이는 도로가 1km 뒤쯤 끊겨있을지 누가 알까. 오롯이 내 선택으로 만나게 되는 희로애락을 만끽하는 길로 나는 걸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