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었다. 멀리서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형체 아래론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림자는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난 긴장하기 시작했다. 갖고 있던 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방아쇠의 차가움이 정수리까지 차올랐다.
'꼴깍'하는 소리가 어둠이 몰고 온 적막을 깨트렸다. 내 쪽으로 달려오는 그림자가 더욱 빨라졌다. 이번엔 방아쇠의 차가움이 손가락 끝에서 손목과 팔뚝을 지나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쳤다. 난 지체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형체가 눈앞에서 스러졌다. 뜨거운 액체가 내 얼굴까지 튀었다. 그래도 무서웠다. 무서워서 쏘고 또 쐈다.
튀어오는 액체가 내 이성을 더욱 차갑게 식도록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검은 형체를 보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누가 나를 붙잡으며 불렀다.
"일어나, 점심 먹어."
순식간에 모든 장면이 찢어지듯 날아갔다. 난 오늘도 헛것이 만든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또 악몽에 시달렸어?"
식탁에서 묻는 엄마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였다. 내겐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수많은 날 중 하나였다.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이런 악몽을 꾸는 내내 난 감기와 동거했다. 콜록거리는 일이 부쩍 많아졌으며 그 때문인지 늘 눈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양치할 때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위산도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날에도 속은 부글부글 터질 듯이 끓었다. 그 신물은 매번 목구멍을 녹일 것처럼 넘어왔다.
"넌 허무주의에 빠진 게 분명해."
사촌 형이 집으로 놀러 와 내게 말했다. 최근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내가 집에 온 날부터 형은 매일 점심 이후 우리 집에 왔다. 날 걱정하는 엄마가 부탁했을 게 분명했다.
"아니야, 난 허무주의에 빠진 게 아니야. 거길 아직 나오지 못한 거야."
"얼른 이겨내야지. 그래서 오늘은 무슨 꿈을 꿨는데? 이번에도 나왔던 꿈이야?"
"어. 몇 가지 돌려 꾸는 꿈 중 하나. 그 검은 형체 꿈."
"제일 처음 꿨다는 그 꿈이네. 이번엔 확인했어? 개야? 늑대야? 사람이야?"
숨 가쁜 질문에 난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군 전역 날부터 난 밤마다 이런 악몽에 시달렸다. 검은 형체부터 숨 가쁘도록 어두운 거리를 뛰는 꿈까지 다섯 개의 꿈을 돌아가며 상대했다.
밤의 피로 때문에 한낮의 삶은 피폐해 갔다. 거세된 밤은 해가 반환점을 돌 때부터 돌아왔다.
한밤의 전투가 두 달여를 지나가자 공포감을 넘어 이제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럴수록 난 TV와 신문과 인터넷을 모두 끊고 철저히 나를 고립했다.
"평탄했던 군 생활 막바지에 터진 하나의 사고였다고 생각해라. 상대가 개인지 늑대인지 사람인지 구분하기 전에 조치를 해야 했는데 전우들은 그걸 못한 것이다. 네가 뭔가 말을 했더라도 그들이 떠났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을 거다. 사실은 사실이 기능할 수 있을 때 사실로서 힘을 가지지. 오늘 위병소를 나가는 순간부터 모든 기억은 두도록. 넌 이제 최 병장도 아니고 상황병도 아니고 5000만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며칠간 조용했던 태도마저 여기에 남겨두고 나간다면 너와 우리와 세상은 모두 조용해질 수 있어."
전역하던 날 아침에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매일 점심 밥반찬으로 떠다녔다. 난 나와 내가 있던 부대의 주요 지휘관만 아는 '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 사건' 직후 대대장은 나를 따로 불렀다. 부대 내 최고 지휘관이 일개 병사와 독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때 대대장은 내게 "전방에서 언제든 있을 법한 사고"라고 설명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게 군인이자 제복을 벗은 뒤 시민의 역할"이라고 대대장은 내게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다.
그 사건은 북한군 2명이 내가 머물던 GP에 다가와 경계병 2명을 사살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난 그 사건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복기해봤다. 아마도 북한군이 귀순 벨 정도만 누르고 가는 의례적인 담력 훈련을 하는 와중에 우발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가정했다. 그게 결국 사건의 발단이 됐을 것이라고 하나마나 한 되새김질을 했다. 어쨌든 그랬다 하더라도 그 또한 명백한 도발 행위에 포함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장 상황을 생생히 증언할 수 있는 경계병 둘은 이미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동료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한 명은 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생을 마쳤다. 즉사한 동료와 의식불명을 거친 동료 모두 실탄 한 발 쏘지 못했다.
나는 그때 소초 안에서 상황 근무를 서고 있었다. 말년 휴가를 일찍 다녀와 전역 전 후방 복귀를 이틀 앞두고 야간 상황 근무만 들어가던 시기였다. 결과적으로 소초장과 해당 상급 지휘관과 전역을 앞둔 나만 입을 잘 다물면 그 모든 사태는 조용해질 게 뻔했다.
"지금과 같은 국제 정세와 남북 관계에서는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야."
난 이런 지시에 고개만 끄덕였다. 양심은 '나랏일'이라는 대의명분으로 포장해버렸다. 선후를 철저히 따졌다. 그토록 꿈꿨던 전역을 목전에 두고 더는 큰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했을지도 모른다.
'나라를 철통같이 지키는 게 효도라면 몸 건강히 돌아오는 건 가장 큰 효도'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끼워 맞춰 되뇌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 사건'은 경계병 한 명이 동료를 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으로 변해 있었다.
실탄이 한 발도 발사되지 않았다는 기록은 부대와 상황일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군대에서 볼 수 있었던 저녁 9시 뉴스에선 그 사건이 나오지 않았다.
난 그날부터 나와 함께 먹고 자던 그들이 받았을 그 긴장감을 상상했다. 매번 귀로만 듣던 막연한 상황이 실제 눈앞에 닥쳤을 때의 내 모습을 그려봤다. 멀리서 다가오는 형체를 보며 나 또한 방아쇠를 쉽게 당기지 못했을 거라고 그들과 나를 동일시했다.
그게 그들에 대한 내 최소한의 양심이자 위안인 것 같았다.
그날 이후에도 난 검은 형체 꿈을 수십 번 더 만났다. 나는 한 발의 총도 쏘지 못한 동료를 대신에 매일 밤 헛것을 향해 총을 쐈다.
소초장의 말과 달리 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사람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쏴야만 했다. 그 결과로 액체가 내 얼굴에 튀어야 겨우 꿈에서 만족했다.
거세된 밤이 지나 낮이 돌아왔을 때 난 비겁함과 양심이란 단어를 쓰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흘 뒤면 GP에서 '그 사건'을 공유한 후임이 전역한다. 내가 전역한 이후 첫 전역자다. 난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난 그에게 헛것을 얘기할 것이고 검은 형체를 전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구분 가능한 개와 늑대와 사람 그림자의 차이를 물을 것이며 그게 사람일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을 맞춰볼 계획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너도 비겁함과 양심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겠느냐'고 물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