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흑백 화면 속 가시나무

by 반동희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가 하는 말이 내 귀에 속속 꽂혔다. 내가 한 말도 그는 정성껏 귀담아듣는 눈치였다. 이런 게 통하는 거구나 싶었다.


'착'하면 '척'이었고 '척'하면 '착'이었다. '이것도 나랑 비슷하네?' '이런 면은 정말 나랑 똑같네' '이렇게 나랑 잘 맞는 사람도 있구나' 등등 마음은 점점 커졌다. 그렇게 나와 그는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세상이 말하는 '우리'가 됐다.


모든 게 흑백 처리됐다. 그와 있으면 이 알록달록한 세상에서 우리만의 칸막이를 치고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달콤한 언어로 둘만의 대본을 쓰고 연기하고 작곡하고 노래했다. 내가 "야"하면 그가 "예"했다. 그가 "예"하면 내가 "야"했다. 아직 컬러 티브이가 없던 시절의 흑백 티브이 속 배우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칸막이 속에서 역할을 했다.


흑백 티브이 주인공이 컬러 티브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감정 표현을 하는 것처럼 우린 열중했다. 노래는 아름다웠고 연극은 늘 희극이었다.


그렇게 사계절이 지났다. 또 계절이 바뀌어 다시 봄이 오고 겨울을 보냈다. 우리는 더 나은 우리가 됐다. 짧은 반팔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그도 봤고 두꺼운 패딩에 목도리가 귀여운 그도 봤다. 큰 링 귀걸이의 청순한 그와 함께 단출한 큐빅 하나가 어울리는 수수한 그도 봤다. 그렇게 시간을 같이 흡수하면서 흑백 화면은 더욱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사소한 대사 하나와 예상치 못한 가사 실수로 화면 바깥의 컬러가 부지불식간에 우리 둘 사이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처음 봤을 때처럼 찰나의 순간이었다. 서로 "네가 먼저 나를 꼬셨어"라고 격의 없게 말할 정도로 기억이 퇴색됐을 때쯤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이따금 나와 너를 찾을 때였다.


그렇게 화면 바깥의 컬러는 우리만의 흑백 화면을 조금씩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주 조금씩 '동질감'에서 '이질감'이 싹텄다. '이런 것도 나와 같네?'로 도배됐던 무의식은 '이런 것도 나랑 다르네?'라는 의식에게 하나둘씩 자리를 내주었다.


어느 날은 마치 교통사고가 나는 것처럼 '쾅'하고 우리 둘만의 흑백 티브이가 흔들리는 일도 있었다. 그 사건의 사후처리를 하며 칸막이 속 흑백 화면은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세상의 물감에 침범당하기 시작했다. 물감이 마침내 우리 화면에 더욱 많이 번져 세상 그 어떤 다른 화면들처럼 데칼코마니 됐을 때 우린 당황했다. 그러다가 처음 시작과 장면은 같지만 대사만 다른 흑백 화면으로 회귀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너로 분별된 머릿속엔 '이별'이란 단어가 자랐다.


그렇게 칸막이는 부식됐다. 우리를 감싸던 것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졌다. 이별은 누가 먼저 말하느냐의 문제로 남았다. 우리가 키운 나무는 잎사귀가 채 남지 않은 앙상한 가시나무가 되었다.


이제는 새 봄날 새로운 잎사귀를 보느냐 마느냐의 선택만이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끝내 우리 둘 중 누군가가 이를 참지 못해 이별을 얘기했다. 흑백 화면이 지지직거리면서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요즘 시대의 그렇고 그런 장면이 툭 튀어나왔다. 특별한 것 같던 우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수많은 화면 중 하나가 되었다.


옆에서 누군가는 가시나무를 버티어내면 새 봄을 맞아 더 풍성한 잎사귀를 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인 것이어서 조언은 조언일 뿐 끝내 기능하지 않는 허공의 말로 산화했다. 가시나무를 덩그러니 남긴 채 우리의 연극과 합창은 끝났다. 우리가 남긴 화면 속 가시나무는 세상 그 모든 이별처럼 더는 자라지 않았다. 저 구석 어느 이름 모를 나무가 되었다.


두고 온 가시나무와 흑백 화면을 잊고 컬러 티브이에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지나 새로운 봄이 왔다. 길거리에 푸름이 번지고 세상은 새로운 봄이 왔다고 설렜다. 아주 잠깐 나는 그때를 버티어내었을 때의 우리를 그려보곤 했다. 그럴수록 흑백 화면 한때의 우리만이 부산물로 남을 뿐 세상은 초연하게 컬러감을 찍어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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