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정혁 Dec 14. 2019

(초단편소설) 스크린도어가 생긴 후에

지하철 선로가 고스란히 눈앞에 있던 시절이었다.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가 생긴 건 당시 사건이 발생하고도 반년 정도 후였다.


지금처럼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던 어느 겨울 저녁이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 소공역에서 일곱 살 아이가 선로에 떨어졌다.


떨어지기 전 아이는 엄마와 단 둘이 있었다. 아이가 막 백화점에서 산 미니카를 가지고 놀다가 일이 벌어졌다.


미니카는 신상품답게 아이가 이전까지 만지던 것과 달랐다. 아이 손에 익지 않은 신상 미니카가 빠르게 질주했고 그걸 잡으려던 아이가 선로로 동반 이탈했다.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걷지 못했던 아이 엄마는 목발을 짚은 채 울부짖었다. 선로에 엎어진 아이가 고개를 젖혀 드는 순간 아이 엄마의 울음소리는 절정에 달했다. 수십 명의 대기 승객 시선은 전부 그녀를 향했다.


스크린도어가 없던 시절에도 열차 도착을 알리는 방송은 친절했다. 그것은 승객을 위한 방송이라기보다는 빠른 이동과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사고로 열차가 지연되는 걸 막기 위한 그 시절 대강의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노란 선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서 대기해 달라는 지극히 열차 중심의 터무니없는 경고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이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렇게 밀려오는 열차가 아이의 신상 미니카를 갈아버리고 이제 막 정신 차려 고개를 든 아이마저 덮쳐버릴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버버리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 선로로 뛰어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펼쳐진 상황이어서 몇몇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몇몇은 남자가 뛰어드는 순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각기 출입구 앞에서 열차가 칸을 내보이며 문을 열었지만 승객 대다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열차가 얼른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열차가 문제없이 지나가면 버버리 코트 남자와 아이가 살아있는 영화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그들은 직감했다.


반대로 열차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따위의 기내 방송을 하며 그 자리에 덩그러니 함께 머무른다면 그것은 필시 미니카 아이와 버버리 코트 남자의 사고를 의미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목발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조차 맘대로 내지 못하고 가슴통에서 꺽꺽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따금 영화 같은 기적은 바쁜 일상에서 겨우겨우 극장에 찾아갈 횟수보다 높은 확률로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열차는 일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출발했다.


그러자 미세먼지가 걷히고 맑은 공기가 눈과 귀를 휘감는 아침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의 아이와 버버리 코트 남자가 선로 한쪽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위로 나타났다.


열차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손뼉 치기 시작했다. 버버리 코트 남자는 뉴스에 영웅으로 소개되었다.


인터뷰에서 버버리 코트 남자는 “저도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연한 일이어서 멋쩍습니다. 아마도 집에 있는 제 아이가 생각났던 것 같아요. 제 아이도 이 아이 정도 되는 남자 아이고 미니카를 좋아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이 남자의 ‘제 아이가 생각났던 것 같아요’라고 한 말은 사실 겸손한 표현이었다. 그보다 이 남자는 확실히 그 순간 자신의 집에 있는 자기 자식이 생각났다. 그러니 ‘생각났던 것 같아요’라는 말보다는 ‘생각나서 그랬다’라고 명확히 설명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남자는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 궁금증의 퍼즐은 훗날 조각을 찾아 재평가되었다.


아무튼 겸손하기까지 한 이 영웅의 이름은 김두식이었는데 삼십 대 중반에 결혼해 사십 대 중반이 된 당시 여덟 살짜리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김두식의 아이 엄마가 없는 이유는 그가 술만 먹으면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파렴치한에 집에는 생활비 한 푼 주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방탕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김두식은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 없이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그가 자신의 아이까지 때리고 학대하는 밑바닥 인간이었다는 거였다. 선로에 떨어진 남의 자식을 구한 영웅 김두식은 실상 가정 폭력으로 자신의 둥지를 파탄내고 혼자 키워야 하는 자식마저 때리고 학대하는 머저리였다.


이런 김두식의 이중성은 훗날 아이를 십 년 가까이 학대하고 학교도 보내지 않은 범죄자를 경찰이 체포했다는 떠들썩한 뉴스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는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한 영웅 김두식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김두식은 종교에 귀의하겠다는 뜻을 보이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교도소 안에서 김두식은 목사와 면담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때서야 자신이 사실은 예전에 아이를 구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으며 당시 일이 세상에 재차 알려졌다.


어떤 자칭 전문가가 이를 두고 TV에 나와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가정 폭력을 행사하고 아이를 학대하던 김두식이 내재된 영웅 심리를 과시하려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살리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라고 하나마나 한 소리를 했다.


이 전문가 행세 낭인은 현대인의 집과 밖에서의 ‘이중성’을 설파하던 도중 이런 말을 한 것인데 그마저도 뼈대는 다 빠지고 잔가지 논리만 왜곡돼 이렇게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인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집 안 모습과 사회 집단에서의 집 밖 모습을 미묘하게 조명하는 여론이 잠시나마 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집에서 자식을 때리는 폭력적인 아버지인 동시에 밖에선 회사에 충성하고 직장 부하마저 수평적으로 존중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이중성이 그러했다.


이것은 먹고살기 위해 밖에선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집에선 애꿎게 다른 게 아닌 틀린 방식으로 살아가는 군상으로 표현됐다.


집에선 아이를 방치하고 자기 꾸미기에 여념 없는 어머니인 동시에 밖에선 한 없이 사람들한테 나긋나긋하고 문화센터 등 자신이 그토록 원한 준거집단에서 교양 있는 사람으로 불리며 사는 이중성도 그러했다.


이것은 더는 무시받고 살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점철돼 교양 있는 사람이란 외부 평가 외에는 전부 뒤로 미뤄둔 타인 의존 군상으로 정의됐다.


집에선 과묵한 데다가 열심히 공부하는 척하면서 학교만 가면 친구들 사이에서 호탕한 아이로 분류되는 자식들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이것은 너무도 오래된 인류의 전통이자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의 옛날 모습이어서 딱히 놀랄 새로운 사안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전부 오답 투성이의 핑계였다.


이는 모두 스크린도어가 생긴 후의 일이었다.

이전 05화 (초단편소설) 동물의 왕국 ‘곡사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