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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Jan 23. 2020

(초단편소설) 동물의 왕국 ‘곡사포’

나이를 먹는 건 어떤 면에서 단순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고 해야 하는 일이 는다. 이것은 꿈이라는 젊음을 현실이라는 늙음과 교환해 가는 여정이다. 필연적으로 의무가 따라붙어 지루함을 수반한다. 피할 노릇도 거의 없다.


월요일 아침 지하철엔 그렇게 늙어가는 군상이 한 트럭이다. 그들 군상은 표백제 뿌린 것처럼 상기된 무표정이며 머릿속은 복잡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심연은 분노와 짜증과 지겨움 같은 닳아빠진 감정으로 꽉 차 있다.


이들은 나이 먹어가며 꿈을 현실에 팔아넘기고 주린 배를 채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지상 최대 과제다. 그렇게 매일 자기도 모르게 회색 표백제를 얼굴에 분칠 하는데 월요일은 잿빛이 더욱 짙다.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현실은 엄중하여 도저히 뗄 수 없는 이런 등가교환 가정이 이들 모두에게 반복되어서다.


그럴 때 이들은 동물의 왕국에 있는 악어새나 낙타나 저 옛날 멸종한 초식 공룡 같은 생명체로 탈을 바꿔 쓴다. 지난주 월요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끼리 아옹다옹에서 누군가 방아쇠를 당겼다.


“우산 좀 잘 접지 아 진짜.”


안 그래도 삼엄한 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비나 눈이 온 날은 엉망이다. 남의 다리를 빗물로 적시거나 시커멓게 눈 녹은 물로 찝찝하게 만들기 일쑤다. 그런 날 누군가 기어코 선전 포고하듯 하늘에 총을 빵빵 쏜 것이다.


“안 그래도 좁은데 뭘 아침부터 짜증이야. 시발.”


익명에 가려진 남자의 선전포고에 우산 든 누군가 중 찔리거나 짜증이 극에 달한 이가 응수했다.


목소리로 보아 젊은 남성이었다. 이제 그가 선제공격에 다짜고짜 응수하면서 익명성이 걷힐 참이었다. 시발이라는 욕은 충분히 정당방위로 차고도 넘쳤다.


“접자면 좀 그러려니 하면 되지 말대꾸는. 지하철이 지 혼자 타? 애미 애비도 없나.”


드디어 선전 포고한 쪽에서 미사일을 쏘았다. 한국에서 ‘애미 애비도 없나’라는 마법의 공격 언어는 연발총과 같다. 저격 대상을 명중할 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겨 일촉즉발 불안감을 더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의중엔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것이 네 가지가 없다는 뜻을 깔고 있다.


마침내 그들 눈이 마주쳤다. 동물 사이의 전쟁이 시작됐다. 연식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꿈을 팔아 늙어가는 처지란 본질이 뒤로 밀렸다.


사람 꽉 들어찬 지하철에서 ‘애미 애비’를 운운한 선제 공격자는 왼쪽 문 앞쪽에 있었다. 반대로 ‘시발’을 무기로 기다렸다는 듯 선전포고에 판 한 번 벌이자고 나선 이는 오른 문 앞에 딱 붙어 고개만 바싹 든 채 입을 씰룩댔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떨어진 이들이 우산으로 서로에게 불편을 초래할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적 상식은 하늘에 총소리가 들린 순간 중요한 사실이 못 된다. 수많은 동물의 탈을 쓴 이들 중 그날 분노가 극에 달했거나 그나마 싸울 힘이 있거나 한 사람이 대강 나서는 셈이다.


“너 이 새끼. 나이도 젊은 놈이 아침부터 어른한테 시발? 너 이 애미 애비도 없는 것처럼 사는 호로자식 어디서 내려. 너 딱 기다려.”


“아니 왜 새끼 새끼 거리냐고. 나이 좀 있으면 반말해도 되고 그래도 되나. 세상이 어느 시대인데. 그러니까 틀딱이란 소리가 나도는 거 아냐. 시발 신도림에서 내린다 왜.”


“뭐 이 새끼가 끝까지 시발? 오냐 신도림. 너 그래 잘 됐다. 월요일 아침부터 똥물 좀 튀자.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새끼는 뭘 새끼래. 그놈의 애미 애비 타령이니까. 말끝마다 새끼는. 내가 니 새끼냐? 애미 애비가 있든 없든 너 알 바 아닌데 너 같은 애미 애비는 없다. 이 틀딱아.”


그러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분노는 어느새 세대 간극을 기반으로 깔려 있었다. 저 먼 옛날 동굴에서도 발견됐다는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인류 공식은 서기 2020년까지 생존해 나이 지긋한 층에 단골 반박으로 퍼져있었다. 그게 맞불처럼 엉겨 붙었다.


지하철은 막 신도림역을 네 정거장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런 동물의 왕국 숲 속 같은 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재미있는 현상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이런 장면을 목격하면 어느덧 짜증이 눈 녹듯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숲 속 다른 관찰 생명들은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촉각을 기울이면서 속으론 은근히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비슷한 장면을 많이 목격한 이를 테면 코끼리 같은 경험 많은 이들은 싸움이 전면전으로 치닫지 않을 거며 또 그저 그런 공갈포만 쏘아대다가 끝날 것임을 알아 피식 웃기도 했다. 그들은 정말로 코끼리처럼 근엄했다.


“모가지 삐쭉 내밀고 얘기해놓고는 쫄지 말고 신도림에서 내려라 이 새끼야. 너 이 새끼 오늘 출근 도장 다 찍었다.”


당연히 그가 출근 도장을 다 찍을 일은 없었다. 아직도 평생 찍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오늘도 일찍 출근해 상사 눈치를 살피다가 월요일 아침 무거운 사무실 분위기에 진저리를 칠 것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것은 매주 반복되는 표백제 바른 이들의 짜증 원천이었다.


“그럽시다. 반말 찍찍하고 애미애비 타령이나 하는 아저씨 같은 틀딱이 이놈의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만드는 건데 내가 오늘 몸으로 알려줄게.”


틀딱이란 표현이 맞는지도 불분명하거니와 헬조선을 지하철 하위 포식자 한 명이 만들었을 리도 만무했다. 차라리 마구잡이 공갈포에 가까웠다.


전쟁 시작 후 지하철은 막 한 정거장을 지났다. 폭증한 분노와 달리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더욱 차서 이제 막 목을 삐죽 올리기도 힘들었다.


더 이상 날카로운 속사포는 없었다. 전쟁은 진전 없이 조용했다. 그들 사이의 밀도는 한층 낮아졌고 무엇보다 구태여 고개를 삐죽 들고 힘을 내어 쏘아붙이기도 힘들었다. 꽉 들어찬 지하철 사람 틈바구니에선 싸우는 것조차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한 수고였다.


지하철은 역에 정차하고 출발하고를 반복했다. 사람은 줄지 않고 점점 들어차 이제 그들은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직사포가 아닌 곡사포만 날려대던 말싸움이 애매해진 건 그때였다. 이것은 정전도 아니고 휴전은 더욱 아니었다. 극적 타결이나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도 없는 하위 포식자끼리의 분노 표출이었다. 그런 감정 배설은 아득한 거리감 속에서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그것은 또 다른 현실이자 싱거움이었다. 이쯤이면 아까부터 지켜본 경험 많은 코끼리 목격자는 조소했다. 타깃 불분명 감정 분출이나 하다가 끝나는 연속극이 반복됐다고 생각했다. 코끼리 아저씨에겐 매주 월요일마다 심심찮게 보아 온 풍경이었다.


지하철 동물의 왕국은 늘 그런 것이었다. 정작 숲 최상위층에 있는 포식자들은 이들과 대면할 일도 없었다. 맞닥뜨릴 일도 당연히 전무했다. 적어도 ‘애미 애비’가 올바르게 있어 그런 단어를 들을 일도 없었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안락하게 이동해 크게 우산을 들고 다닐 필요도 몰랐다.


특히 ‘시발’ 같은 소리를 들을 일은 일평생 손에 꼽았다. 그렇게 최상위층 포식자들은 지하철 안에서 어설픈 곡사포가 먹잇감 사이사이를 날아다니는 것과 별개로 같은 시각 지상의 승용차 안에 편히 있었다.


대신에 그들은 앞에서 자기 차를 운전하는 이들에게 불발탄 곡사포 대신 명확한 직사포를 쏘았다. 때로는 숲 전체를 뒤흔들만한 일점사 방아쇠를 책상에 앉아서 당겨 왕국 전체를 좌지우지했다.


매주 월요일 아침은 그런 간극이 더욱 도드라져 동물의 왕국이 인간 사회가 되고 인간 사회가 동물의 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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