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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정혁 Mar 22. 2021

(초단편소설) 등산역

전국을 유람하던 때였다. 지역 주민을 15분간 방송국과 연결하는 일을 했다. 방송국 외주 피디 신분이었지만 실상은 아르바이트나 다름없었다. 서울과 수도권 시청률이 높아 반년은 더 끌고 갈 수 있다고 외주사의 갑인 방송국 피디가 호평하기도 했다.


처음이야 나도 신기했다. 벌꿀로 유명한 농장을 찾아갔다가 그날 마침 벌들에 쏘이는 주인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쏘이지 않았다.


늑대와 개를 교배해 진짜 늑대개를 키우는 오지를 탐험할 때는 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주인장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보였다. 늑대개가 이를 드러내며 그렁거릴 때 주인장은 대걸레 막대기를 들어 자유자재로 늑대개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론 그 막대기는 결국 늑대개의 이에 갈려 부러졌고 주인장은 황급히 철창문을 닫고 나와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어쨌든 매번 그럴듯한 아이템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내 사수는 기막히게 그런 것들을 찾아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등산역이라는 곳에 가서 그곳의 복고 열풍을 영상으로 담아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내가 속한 외주사 대표는 사실 이번 아이템이 별다를 것 없는 것이라고 시작부터 푸념했다.


실제로 내 사수도 반년 넘는 방송으로 소재 고갈에 놓였으니 이번 한 번은 쉬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자고 대표를 달랬다. 그리고서 자기는 내게 말도 없이 휴가를 떠났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이러하니 나 또한 임시방편 때워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기한 늑대개 정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리도 만무했다.


취재 전 알아보니 등산역은 용산역에서 무궁화호만 타고 갈 수 있으며 그마저도 6시간이 걸렸다. 요즘 같은 시대엔 제주도보다 훨씬 먼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등산으로 가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은 이후 어느 순간엔 내가 기차를 타기 위해 나온 것인지 일을 하기 위해 나온 것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방송이라는 특성상 일말의 긴장감이 있어야 할 것인데 무념무상의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등산역에서의 방송 소재는 그 동네에서 역 주변으로 ‘추억의 거리’를 조성했으니 그것을 대강 그림으로 담고 동네 어르신들이 7080년대의 교복 입고 인터뷰하는 장면 따위나 내보내자는 거였다. 한 마디로 뻔했다. 그 시절 불량식품이 즐비하고 지금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교련복 차림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몇 분 정도 담아 송출하면 그뿐이었다.


그런 소재야 서울이나 인근 수도권에도 차고 넘쳤다. 등산역에 내리자마자 얄궂게도 소나기가 내렸는데 내 몸과 마음도 흠뻑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어르신들이야 자기들이 꾸민 역이 방송을 탄다며 호들갑이었지만 어차피 쉬어가는 회차였다. 나는 건성으로 그분들께 대꾸하며 기계적으로 화면에 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뉘앙스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풀풀 풍겼다. 그래야 오가는 말이 끊겨 괜히 사사로운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계산한 뒤였다. 가끔은 억양 센 사투리에 인상까지 찌푸리며 “네?”라고 되묻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가 자꾸 눈에 거슬렸는데 펑퍼짐한 몸매의 한 아주머니만 어설픈 표준어로 내게 이것저것 캐묻는 것이었다. 어디서 자랐고 어디서 공부를 했으며 어떻게 해서 방송국 일까지 하게 됐느냐고 물어왔는데 그것은 단순 호기심 이상이었다.


심지어 그 아주머니는 막걸리까지 권하기도 했다. 나는 “오늘 집에 빨리 올라가서 딸이랑 놀아줘야 해요”라며 지금 생각하면 앞뒤도 안 맞는 대꾸로 술을 거절했다. 그때 아주머니는 손이 민망했는지 막걸리 잔을 들고 “어휴 그렇지. 중요한 일인데 술 마시면 안 되지”라고 멋쩍은 손을 저리 치웠다.


사실 내 핑계나 아주머니 말이나 돌아보면 횡설수설에 가까웠다. 고작 막걸리 한 잔 마셨다고 집에 가는 여섯 시간 동안 깨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날 “네” “맞아요” “이쪽으로 좀 오세요” 따위의 사무적인 말만 하다가 그 아주머니한테는 “궁금한 게 정말 많으시네요”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내가 홀로 등산역에 도착해 그곳에서 촬영한 시간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사이 동네 어르신들은 왜 이쪽은 찍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자신들이 만든 추억의 가게라며 새마을운동 시절 느낌 나는 밀가루 가게나 학교 앞 문방구 따위를 손짓했다. 하지만 나는 벌써 다 찍어서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눙치고 기차 시간을 머리에 계산하기 바빴다.


용산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막걸리를 권했던 아주머니가 왔다. 촬영 차림 그대로의 옛날 교복차림으로 우산을 들고 달려왔다. 하늘에선 잠시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내 몸과 마음을 더욱 차분히 꺼트려줬던 소나기가 재개된 거였다. 아주머니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왔는데 사실 나는 기차 안에서 소나기를 맞을 일도 없을뿐더러 용산에 도착해 내 차를 타고 집에 갈 생각이었으므로 우산 따위는 막걸리보다도 더 귀찮았다. 하지만 “피디님”이라며 부르는 그 아주머니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도저히 이것마저 무시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이를 거절하며 기차가 오기 전까지 말을 섞는 것이 더 귀찮을 요량으로 판단됐다.


헐레벌떡 달려온 아주머니는 짐짓 멈칫하다가 우산을 건네며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제가 6살까지 서울에서 자랐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고향인 이곳에 와서 자랐어요. 이후에는 제대로 된 학교를 다니지 못는데 마침 오늘 이 촬영으로 몇십 년 만에 교복을 입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아까 막걸리를 괜해 권했나 봐요. 기분 상한 건 아니죠?”


아주머니는 한 손에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와 함께 우산을 건넸다. 서울에 올라가면 딸한테 이걸 꼭 건네주고 좋은 아빠가 되라는 덕담까지 건넸다. 나는 엉거주춤 서서 그것을 받아 들며 감사하다고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출발하면서 아주머니는 점점 멀어졌다. 아주머니는 멀어지는 내내 나한테 손을 흔들었는데 그쯤 되자 나도 모르게 내 손이 먼저 잘 가겠다고 손짓하고 있었다. 감사함보다는 연민이 컸으니 동정쯤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기차에 앉아 비닐봉지를 열었다. 안에는 연필 2 다스와 10권의 공책과 여러 가지 불량식품들이 들어있었다. 추억의 문방구에서 파는 물품들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시절 외할머니가 내게 사준 것들과 비슷하게도 보였다.


추억의 문방구에서 파는 오래된 편지지에 적힌 짧은 쪽지도 있었다. 안에는 ‘좋은 아빠는 딸의 좋은 인생을 만들 수 있어요. 부디 딸이 저랑은 다른 멋진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피디님이 힘내시길 바랄게요’라고 적혀있었다.


차창 밖을 보니 아주머니는 소실점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고 어느새 그 검은 추억의 교복과 함께 머리에 엉거주춤 얹은 모자 형태만 겨우 보였다. 기차는 덜컹거렸고 소나기가 다시 생동해 차창을 적셔나갔다. 이제 아주머니의 형태는 창에 맺힌 빗방울 하나 정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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